김상득의 행복어사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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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34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비 오는 밤 보라에게 우산을 씌워 주느라 선우의 한쪽 어깨가 비에 젖는데, 보라는 그 모습이 자꾸 신경 쓰인다. 선우의 어깨가 신경 쓰이는 보라처럼 아내는 아들의 앞머리가 신경 쓰인다. 그런 머리 형태를 무슨 스타일이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아들의 앞머리는 눈썹을 덮을 정도로 내려와 있다. 아내는 아들의 헤어 스타일이 답답하다. 아들이 머리를 위로 올려 넘겨서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냈으면 좋겠는데 한사코 머리를 앞으로 내리니 아내는 불만이다.


아들, 머리 좀 올리지. 아들은 자신의 머리에 대해 엄마가 간섭하는 걸 싫어한다. 왜요? 그냥 놔 두세요. 잘 생긴 우리 아들 얼굴이 가려지니까 그렇지. 제 얼굴이잖아요. 제 머리고. 자꾸 신경이 쓰이니까 그렇지왜요? 왜 엄마가 제 머리에 그렇게 신경을 쓰세요. 저 이제 스물일곱이에요. 그건 나이 하고는 상관없는 거야. 저번에 빅뱅이 TV에 나왔는데 멤버 중 한 명이 너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어.거 봐요. 유행하는 스타일이라니까요. 그 말이 아니라 TV 보는 동안 내가 답답해 죽는 줄 알았어. 마음 같아서는 가위를 들고 방송국으로 달려가 직접 잘라주고 싶더라니까. 그런데 내가 그 답답함을 매일 내 집에서 내 아들 얼굴에서 느껴야 옳겠니? 엄마, 제 머리잖아요. 제, 머, 리. 그래, 네 머리지. 그렇지만 너는 네 머리를 하루에 몇 번이나 보니? 열 번, 스무 번? 거울 볼 때 겨우 몇 번 보는 게 다잖아. 그렇지만 엄마는 계속 본단 말이야. 백 번, 천 번, 계속해서 네 얼굴을 본다고. 그러니 아들, 잘난 우리 아들아, 제발 머리를 좀 올려주면 안 되겠니? 안 돼요. 엄마가 안 보면 되잖아요. 보이는데 어떻게 안 보니? 제발 제게 간섭하지 마세요. 제 일은, 제 머리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내와 아들이 언쟁을 하는 중에도 남편은 아무 말이 없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누군가에게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지만 누군가를 간섭하는 것도 싫어한다. 이런 남편의 태도에 대해 아내는 그건 남편이 가족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정이 없으니까, 관심이 없으니까, 간섭도 안 하는 거라고. 꼭 그건 아니라고 남편은 말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내 말이 맞는 것 같다.


남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 따라 학교 수업을 빼먹고 2박3일쯤 대전에 간 적이 있다. 부산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던 날 선배는 대전에 남겠다고 했다. 돌아갈지, 여기 계속 있을지 자신은 며칠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그러면서 선배는 편지를 건넸다. 그 편지에 ‘간섭’이라는 말이 들어있었다. 간섭이란 말을 그 전에도 여러 번 보고 들었겠지만 남편은 그날 처음 그 말을 만나는 것 같았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항상 네게 간섭만 하고 싶은 형이.”


그때 남편은 간섭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란 걸 알았다. 그러고 보면 아내나 아들은 남편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다. 남편이 허름한 옷을 입거나 수염 정리를 하지 않거나 휴대전화를 오래 들여다 보고 있으면 금세 간섭한다. 심지어 지나가는 예쁜 여자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게 한다. 아빠, 좀!


현실의 남편, 현실의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남편, 이상적인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있다. 그들이 보기에 현실의 남편, 현실의 아버지는 가능성으로 가득 찬 존재다. 얼마든지 이상적인 남편, 이상적인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그러니까 간섭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의 토로다.


이제 아내는 전략을 바꾼다. 더 이상 아들을 압박하지 않는다. 달콤한 말로 회유한다. 아들, 이마를 드러내면 성공한대. 성공한 사람들 봐. 다들 이마를 시원하게 드러냈잖아. 그러니까 우리 아들도 머리를 좀 올려보렴. 아내의 새로운 전략이 유효한 것일까? 화부터 내던 아들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이 번진다. 아빠는 머리가 없으니까 항상 이마를 드러내놓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왜…. 아내의 표정이 굳어진다. 너희 아빠는 예외지. 어디에나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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