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인턴기자의 현장에서] 마냥 칭찬받지 못하는 '평화지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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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하라.”

지난 5일 서울광장 2차 ‘민중총궐기대회’(백남기 범대위 주최) 현장.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들을 마주보고 폴리스라인에 선 경찰의 무전기에서 다급한 지시가 흘러나왔다. 파란색 목도리를 두르고 ‘평화’라고 적힌 스티커를 붙인 50여 명의 의원들이 다가오자 경찰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경찰은 폴리스라인은 그대로 둔 채 ‘인간띠’를 만들어 한 걸음 물러섰다.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이날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서 ‘평화지킴이’를 자처했다.

문재인 대표는 이날 “집회 시위에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표와 나란히 선 정청래 최고위원은 경찰의 폴리스라인을 가리키며 “우리는 폴리스라인이 아닌 평화의 라인, ‘피스(Peace)라인’”이라고 했다. 의원들은 손에 ‘평화의 꽃’이라고 이름 붙인 장미꽃도 한 송이씩 들었다.

하지만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시위 참가자들의 행진 시작 지점으로 이동하려 할 때 "야당 똑바로 해"라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지금처럼 할 거면 새누리당과 합당하라”는 소리도 들렸다. 의원들은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시위대가 행진을 시작하자 의원들도 따라 나섰다. 시위대 왼편에 일렬로 서서 걸었다. 의원들은 폴리스라인과 시위대의 중간 자리를 지켰다. 의원 대부분은 시종일관 입을 굳게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하지만 이종걸 원내대표 등 일부 의원은 “경찰청장 파면하라” “박근혜는 사과하라” “물대포를 쏘지마라” 등 시위대의 구호를 따라 외치기도 했다. “시위에는 동참하지 않겠다”던 문 대표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집회는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쇠파이프도 각목도 돌멩이도 없었다. 경찰도 차벽과 살수차를 동원하지 않았다. 오후 6시30분쯤 평화지킴이 활동을 마친 문 대표는 기자들과 만나 “오늘 집회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농민 시민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줬다. 경찰도 평화적인 집회 관리를 위해 아주 수고 많이 했다”며 “오늘이 평화적인 집회 시위문화를 더 성숙시켜나가는 원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주최 측은 오히려 새정연 의원들의 행진 참여를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의원들을 중심으로 취재진과 지지자, 시민들이 대거 몰려 일대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워낙 많은 취재진이 몰린 탓에 일부 시민들은 폴리스라인을 넘나들었고, 그 때마다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경찰이 나서 주최 측에 “허가된 2개 차로 밖으로 벗어나지 말라”고 제지에 나섰다. 그러자 의원들을 선두에서 이끌던 김기식 의원이 문 대표에게 “주최 측이 우리 때문에 못 하겠다고 빠져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의원들은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인도에 머쓱하게 서 있다 10분도 안 돼 철수했다.

이날 철수하던 새정치연합 의원들의 모습이 요즘 당 사정과 닮은 것 같다. 대내외적으로 외면받고 있는 현실 말이다. 당내 기득권을 놓고 주류와 비주류의 갈등이 심화돼 탈당얘기까지 나오자 ‘이제 지겹다’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날 평화지킴이 활동에는 비주류 인사로 분류되는 의원 상당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예로부터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다.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된다. 새정치연합 내의 평화 없이는 ‘평화지킴이’와 같은 좋은 취지의 활동도 결국 그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하준호(연세대 정치외교학 3년) 인턴기자 jdoldol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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