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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남미에서 지는 '핑크 타이드'…유가 하락에 경제 직격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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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좌파 블록’이 해체수순을 밟고 있다. 한때 12개국 중 10개국에 좌파정권이 들어서며 ‘핑크 타이드(Pink Tide·온건좌파 조류)’란 신조어를 만들었던 남미 정치 지형에 썰물이 시작됐다는 전망이 나온다.

지난달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중도우파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12년간의 ‘좌파 부부 대통령 시대’를 종식시킨 데 이어 남미 좌파정권의 본류(本流)를 자처했던 베네수엘라 총선에서도 우파 야권연대가 7일(현지시간) 승리했다.

이날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6일 치러진 총선 중간개표결과 야권연대인 민주연합회의(MUD)가 전체 167석 가운데 99석을 차지했다고 밝혔다. 집권 통합사회주의당(PSUV)은 46석에 그쳤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집권 이후 치러졌던 1999년 총선 이후 야권이 승리한 건 처음이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 때문이다. 세계 7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전체 수출의 95%를 원유에 의존하는 나라다. 하지만 올해 유가·국재 원자재가격 하락의 이중고를 겪으면서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재정파탄을 맞았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마이너스 10%,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59%에 달할 전망이다.

차베스 집권 이후 베네수엘라는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외교적으론 남미 좌파블록의 맹주 역할을, 내적으론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입각한 생산시설 국유화와 복지확대 정책을 펴 왔다. 남미 좌파정권들은 2000년대 초반 국제 원자재 강세장(수퍼사이클) 국면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재정의 30% 이상을 복지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국가기간시설 투자보단 복지수당 같이 ‘휘발성’ 재정지출에 주력한 결과 경제의 체질 개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칠레 여론조사기관 라티노바로메트로의 마르타 라고스 대표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과 인터뷰에서 “돈이 떨어지면 포퓰리즘도 없는 법”이라며 “소비재 호황의 종말이 좌우정권에 모두 상처를 주겠지만 포퓰리스트 좌파정권은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온건좌파의 상징이었던 두 남미 대국(大國), 브라질과 칠레 정권도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2일 브라질 하원은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절차에 들어갔다. 지난해 말 재선에 성공했던 호세프 대통령은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과 집권여당의 부패스캔들로 지지율이 10% 아래로 떨어진 상태다.

한때 ‘칠레의 어머니’로 불리며 85%에 달하는 지지율을 자랑했던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도 20%대의 낮은 지지율로 고전 중이다. 지난해 1.9%의 낮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던 칠레는 국제 원자재가격 하락으로 마이너스 경제성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아들이 칠레은행에서 부당대출을 받아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까지 불거졌다.

◇베네수엘라는 어디로=우파 야권연대의 승리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의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013년 사망한 차베스 전 대통령의 후계자인 마두로 대통령은 선관위 발표 직후 패배를 시인하고 “경제위기 타개를 위해 의회가 힘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의회권력을 차지한 야권이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 투표를 추진하고 구속된 야당인사 석방을 위한 사면법 제정에 나설 것이란 예상이 나온다. 모든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국민소환이 가능한 베네수엘라 헌법에서 국민소환투표를 하려면 의회의 5분의3(101석) 찬성이 있어야 한다.

야권 승리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은 레오폴도 로페스(44) 민중의지당 대표다. 지난해 봄 반정부 시위혐의로 체포돼 수감중인 로페스 대표는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을 나온 명문가 출신 보수정치인이다. 잘 생긴 외모에다 베네수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크리스토발 멘도사의 증손자이자 남미 독립운동의 아버지인 시몬 볼리바르의 먼 손자뻘인 그는 ‘남미의 케네디’로 불린다. 2002년 반 차베스 쿠데타를 주도했고 지난해 체포 직전 “나의 투옥이 민중을 깨울 수 있다면 가치가 있다”는 말을 남기고 부인과 작별 입맞춤을 한 뒤 경찰에 체포되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정적(政敵)이었던 차베스 전 대통령이 92년 쿠데타에 실패한 뒤 방송 카메라 앞에서 “쿠데타 실패의 책임을 지겠다”고 연설한 뒤 구속됐던 장면을 연상케 하는 행보였다. 정치적 입장은 정반대지만 인기영합주의 정치인이란 점에서 차베스와 비교되는 이유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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