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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가 적다가 … 깔끔하게 뜯어내는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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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6호 22면

후배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새 책 『문구의 모험』을 냈다. 문구도 모험이 필요할까? 일부러 서점에 들러 책을 산 건 순전히 호기심 당기는 제목 때문이다. 사람이나 책이나 작명이 좋아야 잘 풀리는 게 맞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구란 학교 졸업하면 더 이상 쓸 일 없는 물건이 되어버린다. 헌데 여전히 문구와 함께해야 하는 부류들이 있다. 글 쓰는 작가, 디자이너, 화가, 건축가, 사무직 종사자부터 음식 주문받는 종업원까지. 이들에게 문구란 한 때가 아닌 진행형의 도구다.


한 번 잡은 책은 단번에 읽혀질 만큼 재미있었다. 미처 알지 못한 시시콜콜한 문구의 이야기들은 듬성듬성했던 관심의 맹점을 일깨워준다.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다. 내 책상 위의 문구들은 그저 그런 물건들이 아니었다. 문구의 대표 격인 종이와 펜뿐 아니라 포스트 잇, 형광펜 같은 물건들은 이전에 없던 기능으로 새로운 생각과 행동마저 이끌어냈다. 디지털의 편리함에 가려져 있어도 없어도 그만으로 여기기 쉬운 게 문구다.


그렇지 않다. 여전히 간편하며 손에 닿는 대로 쉽게 써지는 도구로 문구 만한 게 없다. 어떤 이는 이 작고 사소한 물건으로 커다란 일을 만들어간다. 멋진 자동차의 외관도, 거대한 공장설비의 설계도가 연필 한 자루와 종이로 시작되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손이 근질거리는 한 문구의 종말은 없다.


뭔가 써 두고, 그려서 남겨두려는 인간의 기록 본능은 원시와 현대를 관통한다. 과거의 기록 방식을 열등하게 바라본다면 지독한 오만이다. 단순할수록 강인한 생명력이 외려 유지되지 않던가. 로제타 스톤과 광개토대왕비는 돌판에 글자를 새겨 넣어 살아남았다. 세월의 풍파를 딛고 여전히 읽혀지는 보존성은 디지털 시대에 새삼 돋보인다.


배터리 방전으로 내용물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스마트폰의 허약함과 포맷 변경으로 무용지물이 되는 메모리 장치의 불안함을 생각해 보라. 손글씨를 집어치워야 할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현대판 정과 돌판인 연필과 종이의 장점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새롭게 쓰고 그려야 할 일이란 여전히 많다. 첨단의 대척점에 원시의 날것이 균형을 잡아준다면 이보다 든든한 것이 없다.


종이, 감각의 대상이 되다 사용하는 문구를 새삼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많은 종류가 널려 있다. 필기구의 주축인 연필을 비롯해 볼펜, 수성펜, 만년필, 색연필, 마커펜…. 쓰는 도구의 종류만큼 지우개도 여러 개다. 연필깎이도 휴대용을 포함해 종류별로 갖춰놓았다. 종이가 없으면 필기구란 무용지물이다. A4 복사용지를 비롯해 메모지, 리걸 패드(유럽의 법조계 인사들이 쓰던 종이에서 유래)가 널렸다. 종이를 철해둘 클립과 스테이플러(우리에겐 호치키스란 명칭이 더 친숙하다)도 있다. 책상 위의 온갖 문구들은 살아온 시간만큼의 더께로 쌓인 것이 분명했다.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이들 문구를 만지작거리고 산다. 번잡하지만 싫지 않다. 이게 내 삶의 방식이다.

갖고 있는 문구를 사용 빈도로 순위 매긴다면 역시 연필과 종이다. 사놓고 뚜껑도 열지 않은 필기구도 제법 많다. 저절로 손이 가는 게 연필이다. 단순하고 편하게 끄적이는 일을 해결해 주는 주축이랄까. 사각거리는 소리와 감촉에 나무 향까지 번지는 오감충족의 재간둥이를 대체할 물건은 없다.


그 연필도 받쳐주는 좋은 종이가 없다면 반쪽의 충족이다. 혹시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인 ?응가?를 아무 화장지로 마무리하는 불경스러움을 저지르시는지. 민감하고 연약한 부위에 닿는 화장지를 이것저것 갈아대며 써선 안 된다. 똥꼬도 지조가 있는 법이다. Y사의 순펄프 제품이거나 S사의 보풀이 적은 부드러운 두겹 두루마리 화장지로 고집해야 순정의 실천이다. 종이는 생각보다 민감하다. 아무나 쉽게 대충 만들 수 있는 그저 그런 물건이 아니다.


종이는 펄프의 재질이나 함량, 두께와 표면 처리의 정도에 따라 품질이 달라진다. 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왠지 성에 차지 않는 종이가 있게 마련이다. 성분과 정도의 파악까진 힘들지 몰라도 필기구를 든 손은 기막히게 차이를 느낀다. 뻑뻑한 느낌이 들거나 번지는 정도가 다르다. 같은 연필과 만년필이라도 나가는 느낌이 다르고 써진 글자의 짙고 옅음에 차이가 난다. 창백한 백색의 종이보단 미색이나 노란색에 감정도 쉽게 녹아든다. 종이 또한 감각의 대상이 된다.


손에 착 달라붙는 노란색 종이의 감촉종이의 품질을 따지는 백성들이 사는 나라는 뭔가 다르다. 쓰고 읽는 일이 일상화된 사람들의 보편적 교양의 폭과 깊이가 다른 이유일 것이다. 매사 둔감하거나 실용정신이 투철하다면 종이 하나를 놓고 호들갑 떠는 이유를 한심하게 바라볼 수도 있겠다. 헌데 제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은 일상 너머의 가치와 의미를 소중하게 여기는 행동이다. 삶의 풍요란 별것 아니다. 감정과 감각의 차이를 생활 속에 녹이는 선택의 반복이다. 남들이 모르는 저만의 호사는 즐겁기만 하다.


이제 손글씨를 쓰는 일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일부러 하는 시대의 선택인 덕분이다. 아무 종이에나 글씨는 써진다. 하지만 특별한 선호의 아이템을 고집하는 맛도 괜찮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종이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습관은 의식처럼 각별해졌다.


만나기만 하면 메모지를 꺼내 적기 좋아하는 홍성태 교수가 있다. 그의 선택은 종이 윗부분에 절취선이 있는 리갈 패드다. 언제 어디서든 바로 쓰고 부욱 찢어 다시 쓴다. 무엇이라도 써 둘 수 있는 마음 편한 기록방식을 버릇으로 삼은 이다. 어떤 소설가는 반드시 A4 규격의 노란색 리갈 패드가 아니면 원고가 써지지 않는다는 괴벽을 지녔다.


나 역시 노란색의 리갈 패드를 좋아한다. 백색의 노트에 비해 따스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매력이 있다.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나 불편해 한다. 맥락이 연결되지 않는 단상도 껄끄럽다. 지저분하게 지우느니 뜯어내고 새로 쓰는 게 편하다. 쉽게 뜯어낼 수 있는 리갈 패드는 완결을 원하는 심리를 기막히게 읽었다. 뜯기 위해 쓰는 종이가 바로 리갈 패드다.


스프링으로 철한 노트는 맛이 다르다. 같은 기능이라도 두꺼운 종이와 굵은 철사의 저항감이 크다. 새로 시작할 마음을 방해하는 느낌이다. 리갈 패드의 종이는 얇아 손에 감길 듯한 감촉으로 살갑다. 줄이 쳐져 있어 필기의 집중도 또한 높여준다.


여기에 붉은색의 횡선을 더해 직관적 단락 구분도 쉽다. 뒷부분의 두꺼운 합지는 책받침 역할을 대신한다. 잘 뜯어내기 위한 절취선의 정밀도가 돋보인다. 세밀한 칼선의 땀은 뜯는 순간 종이만의 촉감과 소리를 악기의 그것마냥 만들어버린다.


리걸 패드는 널렸다. 한때 유명했던 유럽과 미국의 브랜드는 직접 생산을 포기한 지 오래다. 중국 아니면 인도네시아에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내용이 없는 허명이란 내겐 아무런 소용 없다.


난 국내 문구업체인 ‘알파’에서 만든 핸디 패드를 선택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의 자부심이 담긴 노란색 종이는 이제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내 가방엔 크고 작은 알파 패드가 들어 있다. 종이 한 장에 담겨질 새로운 내용의 기대가 중요하다. 오늘도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놀라운 통찰력을 지닌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시도를 눈여겨 보기 위함이다. ●


윤광준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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