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얀마시리즈-2] 극심한 빈부격차…‘그들만의 리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사 이미지

양곤 인근 빈민가 흘라잉타르 지역의 빈민가와 길 건너 부자 동네 FMCITY [사진=정원엽 기자]

군부독재 53년. 개혁개방 5년을 거치며 미얀마의 빈부격차는 상상 이상으로 심해졌다. 부자는 더욱 부가 쌓였고, 빈자는 설 자리를 잃었다. 연평균 8%에 가까운 성장율의 그늘에는 10%에 가까운 인플레이션이 있다. 국립대학 교수의 월급이 15만짯(약 15만원)에 불과하지만 한달 월세는 50만짯에 달한다. 국제통화기금(IMF)등이 집계하는 1인당 국민소득(GNI)은 1200달러(138만원). 월 평균 12만원이 안되는 금액이다.

미얀마에는 ‘크로니(cronies)’라 불리는 군부 결탁 부자들이 주요기간 산업을 독점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다. 현지 분석에 따르면 군부 지주회사 2~3개가 전체 경제의 60%가량을 좌우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서양곤 기술대학에서 토목학을 가르치는 김흥국 교수는 “미얀마에는 이미 ‘그들만의 리그’가 자리하고 있다”며 “국민 대다수인 가난한 이들의 지지를 받은 아웅산 수지 대표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미얀마에 가져오기 위해서는 빈부격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20일(현지시간) 미얀마 양곤 서부 대표적 빈민가 흘라잉타르가 지역을 찾았다. 양곤 시내 중심부에서 택시를 타고 20여분. 조금씩 건물이 낮아졌다. 다리를 건너자 풍경이 바뀌었다. 도로가 비포장으로 바뀌었고 택시 기사는 “여기서 부터 바깥쪽은 모두 빈민가”라고 했다.

군데 군데 움푹 파인 비포장 도로 옆으로 움막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택시를 세우고 문을 열자 눈동자 몇개가 따라붙었다. 몇몇 꼬맹이들이 바구니를 들고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바구니를 흔들었다. 짤랑짤랑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부를 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는 흔한일”이라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학교에 가지 않느냐고 묻자 “돈이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기사 이미지

길가에 자리한 무허가 판자촌 [사진=정원엽 기자]

마을 사람들은 인터뷰를 하길 꺼려했다. 무허가 불법 판자촌이 헐릴까 두렵다고 했다. 인근에는 중국계 자본이 지은 공장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사람들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밥을 지어 팔고 있었다. 공장 노동자의 월급은 한달에 10만짯이고 그들이 파는 기름에 절은 튀김은 500짯이었다. 주름이 깊게 패인 한 남성은 2008년 태풍 나르기스가 할퀴고 간 이후 빈민이 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태풍으로 14만명이 사망했고 15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었다.

끝내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한 노파(65)가 입을 열었다. 마을에 1000여채의 무허가 판자집이 있다고 했다. 한 집당 4명~6명이 산다고 했다. 얼추 계산해도 5000여명이 사는 셈이다. 인터뷰 하는 할머니 뒤쪽으로 문도 없는 대나무 움막집이 훤히 보였다. 가재도구는 없었고 언제 빨았는지 모를 색색의 천들이 보였다. 할머니는 그걸 덮고 잔다고 했다. 움막 아래는 늪지였다.

기사 이미지

대나무로 엮어 만든 움막집 [사진=정원엽 기자]

이곳에 어떻게 오게됐는지 물었다. 그는 “1993년까지는 양곤 시내에 살았는데 대형 화재가 발생하고 정부가 집을 새로 지은 후에 집세를 너무 올려서 이사를 했다”고 말했다. 현 테인 세인 대통령이 개혁개방 정책을 쓴 후에 변화를 묻자 “없던 다리가 생기고 길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고 답했다. 오랜 군부 독재 기간을 거치며 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몸소 체득한 듯 했다.

기사 이미지

라카족의 음식을 팔고 있는 우 아웅 저 뗏씨 가족. 리어카 옆으로 자녀들의 교복이 걸려 있다. [사진=정원엽 기자]

자리를 옮겨 옆 마을로 향했다. 노점을 하는 우 아웅 저 뗏(36)씨가 한참 숯을 달구고 있었다. 서부 라카인주 라카족의 음식을 파는 그는 한달에 10만짯 정도를 번다고 했다. 이번 선거에 투표를 했는지를 묻자 “쫒겨나기 전에 살던 양곤 시내까지 가서 투표를 했다”고 답했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선거날 고향지역까지 가서 투표를 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딸 2명과 아들이 1명 있다는 그는 9살짜리 막내를 손으로 가리키며 “1년에 학비가 3만짯 정도 하는데 형편이 어려워서 막내는 학교를 못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막내는 식당 옆 대나무로 만든 움막에 걸린 언니 오빠 교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아웅산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승리 이후 기대감을 물었다. 그는 “NLD에 투표했지만 우리처럼 언제 쫒겨날지 모르는 사람들은 변화가 두렵다”고 답했다. “정치를 잘 모르지만 지금만큼이라도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돌아 오는 길에 판자촌 앞으로 ‘FM씨티’라고 적힌 부자촌을 지나왔다. 앞에는 사설 경비가 서서 빈민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었고, 노점을 하는 사람들은 부자촌 안에서 누가 나오지 않는지를 연신 살피고 있었다. 택시기사는 “부촌인 골든밸리 지역의 집값은 20억짯을 넘는 집도 즐비하다”며 “많은 사람들이 불교 윤회사상의 영향으로 빈부가 지난 삶의 업이라고 여기고 인정하지만, 가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고 말했다.

양곤=정원엽 기자 wannabe@joongang.co.kr
관련기사
[미얀마 시리즈 1-프롤로그] 한국과 닮은 그림자 미얀마
[미얀마시리즈-2] 극심한 빈부격차…‘그들만의 리그’
[미얀마 시리즈 3] "20년을 기다렸다" 수지 여사의 집사를 만나다
[미얀마시리즈 4] "한국보다 더 나은 모델 만들겠다" 미얀마 청년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