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금요일] 법인세 무서워 짐싸는 미국 기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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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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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자의 페니실린 홍보 포스터

제약회사 화이자는 가장 미국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전쟁터에서 미군들을 지키고 살려낸 애국적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미군 병사들에게는 총·실탄·전투식량, 그리고 화이자의 페니실린(항생제)이 지급됐다. 부상당했을 때 감염을 막기 위해서였다.

페니실린으로
미국 구했던
화이자 너마저

 경영 전문지인 포춘은 “화이자의 의약품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미군 병사와 생사를 같이했다”며 “이는 회사의 탄생에 비춰 적잖이 역설적일 수 있다”고 촌평했다. 설립자인 찰스 화이자가 독일계여서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흘렀다. 가장 미국적인 화이자가 올해 미국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또 하나의 역설이다. 화이자는 지난 24일 아일랜드 회사인 앨러건과의 합병을 발표했다. 겉으론 세계적인 히트 약품의 만남이다.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화이자)와 주름 개선제인 보톡스(앨러건)의 결합이어서다. 합병 법인은 존슨앤드존슨을 제치고 세계 최대 제약회사로 발돋움할 전망이다.

 그런데 갑자기 비판이 튀어나왔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두 회사의 합병을 “비애국적 행위”라고 말했다. 거대한 화이자가 중소기업 수준인 앨러건에 매수되는 방식으로 미국을 탈출하려고 한다는 이유에서다. 전형적인 ‘기업 이전(Corporate Inversion)’이다. 이는 미국 회사가 외국 회사와 인수합병(M&A) 등을 한 뒤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는 걸 말한다. 최근 많은 미국 기업이 이런 이전을 추진해 ‘미국 탈출’로 불리기도 한다.

 미국 탈출의 목적은 법인세 줄이기다. 화이자의 최고경영자(CEO) 이언 리드도 인정했다. 그는 지난달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세금이 (우리가) 살길을 찾아 나서도록 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의 법인세율은 35%(명목) 정도다. 반면에 아일랜드 법인세율은 12.5% 수준이다. 22.5%포인트 차이가 난다. 톰슨로이터는 “화이자가 본사를 아일랜드로 옮기면 법인세를 연간 10억~20억 달러 줄일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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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의 미국 탈출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80년 초부터 본격화했다. 세계적인 건설회사 맥더모트가 82년에 파나마로 옮겨갔다. 현지에 페이퍼 컴퍼니(Paper Company)를 세운 뒤 합병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이후 10여 개 미국 기업이 파나마·버뮤다·케이맨군도 등 조세피난처로 본사를 옮겼다.

 세금 때문에 기업이 미국을 떠나는 일은 맥더모트 이전까지 거의 없었다. 미국은 여러모로 세계 최대 시장이었다. 한 기업이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시장에선 프리미엄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투자은행 등 금융회사가 규제를 피해 영국 런던이나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으로 주요 부서를 옮기는 일은 있었다. 미 금융역사가인 존 고든은 그의 저서 『월스트리트 제국』에서 “투자은행이 주요 부서를 더시티(런던 금융 중심가)로 옮기면서도 본사는 월가에 뒀다”고 설명했다.

 상황은 80년대 들어 확 바뀌었다. 파나마 등 전통적인 조세피난처뿐 아니라 서방 중소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법인세를 낮추기 시작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아일랜드와 벨기에 등이 자본(기업)을 유치해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법인세를 낮추는 쪽으로 경제 전략을 수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나라는 세율만 낮춘 게 아니었다. 일자리 기준을 충족하면 아예 법인세를 일정 기간 물리지도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조세 보고서에서 “국가 간 세금 깎아주기 경쟁이 시작된 80년대부터 일자리를 많이 만들면 법인세를 덜 내도록 하는 경제정책이 본격적으로 도입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업의 미국 탈출 러시는 2004년 이후 한풀 꺾였다. 블룸버그통신은 “그해 미국이 법규를 바꿔 기업이 버뮤다 등으로 가는 것을 막았다”고 설명했다. 마침 미 경기도 좋았다. 낮은 인플레이션-안정적인 성장 국면이 이어졌다.

 이런 추세는 얼마 못 갔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문제였다.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다시 기업의 미국 탈출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미 경제가 대침체(Great Recession)에 빠지면서 순이익 증가율이 정체된 업종의 기업이 미국을 떠난 것이다. 유가 추락으로 애를 먹던 에너지 기업(엔스코)과 제약회사 등이 아일랜드·네덜란드 등으로 본사를 옮겼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04년 개정된 법규에 허점이 있었다”고 했다. 바로 미 기업 규모의 4분의 1 이하인 해외 기업과 합병할 경우 기업 이전을 할 수 있는 허점이다. 블룸버그는 “화이자가 작은 제약회사인 앨러건과 합병한 이유가 바로 2004년 개정된 법규의 틈을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런 기업 탈출의 형태가 변하고 있다. 미 기업 경영자들은 지난해부터 본사 이전 대신 ‘구글식 세금 피하기’로 불리는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톰슨로이터는 “구글의 영국 법인이 번 돈을 세율이 낮은 벨기에 법인에 이전하는 수법으로 구글이 영국에서의 세금을 피한다”고 보도했다. 예컨대 구글의 영국 법인은 벨기에 법인에 컨설팅을 받은 대가로 터무니없는 비용을 지불하는 수법을 동원했다. 이런 순이익 몰아주기로 발생하는 ‘법인세 블랙홀’은 연간 2400억 달러(약 275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마다 파키스탄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세금이 블랙홀로 사라지는 셈이다.

 요즘 화이자의 기업 이전은 워싱턴의 뜨거운 감자다. 블룸버그는 “이전까지 기업 이전을 둘러싼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제약 메이저인 화이자의 이전은 미국 대통령 선거와 맞물려 대논쟁으로 커지고 있다”고 전했다.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 경선주자들이 기업의 미국 탈출을 놓고 입씨름을 시작했다. 미 재무부는 법인세 법규 개정안을 발표했다. 기업 탈출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다.

 정치권 논란을 예상했을까. 화이자의 CEO인 리드와 앨러건의 CEO인 브렌턴 선더스는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놓았다. FT는 “두 회사 위약금이 4억 달러밖에 안 된다”고 25일 전했다. 어느 한쪽이 계약을 깨면 상대에게 지급해야 하는 돈이다. FT는 전문가의 말을 빌려 “보통 합병 대금이 1600억 달러 정도면 위약금이 30억~35억 달러가 되는데 두 회사의 위약금은 적어 큰 부담이 안 된다”고 전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합병이 무산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경영자들의 말을 빌려 “화이자-앨러건 합병이 무산된다고 해서 기업의 미국 탈출 러시가 진정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높은 세율만이 문제가 아니어서다. 포브스지는 “미국은 기업이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인 순이익에 대해서도 세금을 물리는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는 현재까지는 법인세제를 바꿀 뜻이 없어 보인다. 재정적자를 줄이는 일이 발등의 불이어서다. 대신 주요 20개국(G20)과 OECD가 추진하는 법인세율 차이 줄이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 최근 G20은 구글식 세금 피하기를 막기 위해 공동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위해 먼저 구글 등이 세계 각국에서 얼마를 벌어 세금을 어디에서 얼마나 내는지 정보를 공개하도록 했다. 2400억 달러에 이르는 법인세 블랙홀은 과연 사라질 수 있을까.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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