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소 앞에서 발길 돌린 YH 여공 … “YS는 심정적 동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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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9년 8월 서울 마포구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여성 근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들에게 “모두 환영합니다”라고 말했다. 170여 명이 폐업에 항의해 3일간 농성했고 경찰은 1200여 명을 투입해 강제 해산했다. [사진 김영삼민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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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최순영, 권순갑, 정만옥.

지난 22일 오후 8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입구로 한 여성이 들어섰다. 1979년 8월 YH무역농성사건 당시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S씨(60)였다. 그는 취재진과 정치인들로 북적이는 빈소엔 들어가지 않은 채 5분가량 머물다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김 전 대통령은 일종의 심정적 동지였어요. 가슴이 먹먹합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멀리서나마 배웅하고 싶었어요.”

1979년 농성사건 주역 60대 여성
“멀리서나마 가시는 길 배웅하려고”
일방 폐업에 무작정 신민당사로
“손 잡고 지켜주겠다는 모습 생생”
“아침이슬 부를 때 YS 음정 안 맞아
동료들과 정말 오랜만에 웃었죠”

 36년 전 그녀는 ‘스물네 살 가장’이었다. 가발 제조업체인 YH무역에 다녔다.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한 달에 이틀 쉬었다. 그러면 손에 쥐이는 돈이 월 9만원.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의 끼니부터 학비까지 책임지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그런 상황에서 일방적인 폐업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어요. 공장 기숙사에 전기며 물이며 다 끊기고 나니 ‘삶이 끝난다’는 말이 실감 나더군요.” 그는 1979년 8월 9일 동료 여공들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신민당사로 무작정 찾아갔다.

 “생존의 문제였어요. 눈물 반 콧물 반으로 당사에 들어가 김 총재를 처음 만났습니다. 김 총재가 우리에게 건넨 첫마디가 ‘모두 환영합니다’였어요. ‘정치 생명을 걸고라도 끝까지 지켜드리겠다’고도 했죠. 그 말을 듣고 저는 옆에 있던 동료의 손을 꽉 붙잡았어요.”

 김 전 대통령은 “배가 든든해야 힘을 낸다”며 여공들에게 비빔밥과 물 등 식사를 제공했다. 부인 손명순 여사도 당사로 찾아와 빵과 우유를 돌렸다.

 하지만 농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른바 ‘101진압작전’. 11일 새벽 2시 경찰 1200여 명이 신민당사로 들이닥쳤다. 여공들은 의자와 책상으로 강당 문을 막고 창문에 매달려 저항했지만 거기까지였다. S씨는 “팔다리를 붙잡힌 채 ‘닭장차’로 끌려가는데 까만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눈물도 안 나왔다”고 말했다. 진압 직후 스물한 살 된 여성 근로자 김경숙씨가 추락해 숨진 채 발견됐다. 이에 항의해 당원들과 농성을 벌이던 김 전 대통령은 10월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다.

 당시 YH무역 노조 지부장이던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도 22일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그는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당사를 내주는 결정을 하긴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손을 잡고 ‘지켜주겠다’던 김 전 대통령의 모습은 여공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노조 부지부장이던 권순갑(59)씨는 “외부엔 투사 이미지가 강했을지 몰라도 눈매나 말투 등에서 보듯 선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고 했다.

 농성에 참여했던 정만옥(59)씨는 당시 김 전 대통령과 당사 강당에 둘러앉아 ‘아침이슬’을 부르던 기억을 떠올렸다.

 “김 총재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자꾸 음이 안 맞는 거예요. 어린 여공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죠. 우울하고 막막한 날의 연속이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웃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적막이 흐르자 갑자기 막내 여공 한 명이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강당 전체가 눈물바다가 됐죠.” 김 전 대통령은 그런 여공들을 다독이며 “울지 마세요.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보고 울지 말라던 김 총재도 같이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22일 서거 소식을 접하고, 36년 전 그 장면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부디 좋은 곳에서 영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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