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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연대가 테러를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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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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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순회특파원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안탈리아는 ‘신(神)들의 휴양지’로 불리는 곳이다. 주요 20개국(G20) 정상들은 15, 16일 이곳에 모여 ‘포용적이고 견고한 성장’을 주제로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눌 계획이었다. 13일의 금요일 밤, 파리를 피로 물들인 ‘11·13 테러’의 충격파로 안탈리아 정상회의는 ‘긴급 테러 대책회의’가 되고 말았다. 정상들은 파리 대학살극의 배후로 지목된 이슬람국가(IS)의 반(反)문명적 테러 행위를 강력히 규탄하고, 폭력적 극단주의를 근절하기 위한 국제공조를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실천적 합의사항은 없었다. IS 척결이라는 대의명분에는 한목소리를 내면서도 구체적 실행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조직인 IS는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과 5년째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 속에서 탄생했다. 전쟁과 내전으로 인한 힘의 공백을 배경으로 IS는 급속히 세력을 키웠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엄격하게 집행하는 칼리프가 통치하는 진정한 이슬람의 나라를 표방하며 IS는 종교의 이름으로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IS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국한된 지역 무장조직의 성격을 넘어 글로벌 테러의 지휘본부이자 송출기지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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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와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은 공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라크 전쟁 실패의 교훈을 내세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상군 파견에 여전히 난색을 표하고 있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휘하의 정부군 지원에 주력하고 있다. IS 격퇴보다 시리아 내 반군 퇴치가 우선이란 판단이다. 인접국인 터키는 IS와 싸우는 과정에서 쿠르드 반군의 세력이 커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시아파 이슬람의 맹주인 이란은 이 기회를 이용해 시아파 세력 확대에 골몰하고 있다. 파리 테러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가 단일 공동전선을 펼치기 어려운 이유다.

 IS는 종교적 ‘광신주의(fanaticism)’가 낳은 괴물이다. 9·11 테러를 자행한 알카에다보다 더 광신적이다. 알카에다는 무슬림이나 여성과 어린이는 테러 대상에서 가급적 제외한다는 내부 지침이라도 갖고 있지만 IS는 남녀노소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맹목적 신념에 도취된 이들에게 자살공격은 거룩한 순교일 뿐이다. 또 소셜미디어 등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서구와 이슬람권의 힘없고 철없는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재주도 뛰어나다. 7만~8만 명으로 추산되는 전체 병력 중 외국인 출신 지하디스트가 2만~3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 병력으로 한반도의 3배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약 1000만 명의 주민을 장악하고 있다.

 자신의 종교와 신념만이 100% 옳다는 착각에서 광신주의는 싹튼다. 광신자들에게는 남의 의견을 존중할 때 내 의견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관념이 아예 없다. 종교나 신념이 다른 사람은 무조건 배척하거나 제거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종교와 신념의 자유는 존중해야 하지만 야만주의의 다른 이름인 광신주의는 척결 대상이지 관용의 대상일 수 없다.

 서로 다른 셈법 탓에 전 세계 주요국들이 겨우 이 정도 광신적 집단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건 문명사회의 수치다. 적청백(赤靑白) 삼색 조명으로 프랑스의 희생자들을 애도한다고 문명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해법으로 참혹한 시리아 내전부터 종식시키고, 모든 역량을 IS 척결에 모아야 한다.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한다면 다음 표적은 워싱턴과 런던, 베를린과 모스크바가 될 수 있다. 서울이나 베이징, 도쿄도 예외가 아니다.

 파리 시민들이 쓴 문구 가운데 “눈물은 흘려도 결코 두려워하진 않는다(We weep but never fear)”는 구절이 있었다. 바로 그렇다. 테러에 겁을 먹는 것은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눈물을 닦고 본래의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 음악회와 경기장에 가고,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커피와 포도주를 마시며 가족과, 연인과 사랑을 속삭여야 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기쁨(joie de vivre)’을 누려야 한다. 그것이 테러를 이기는 길이다. 테러가 프랑스인들 삶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외국인, 특히 무슬림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언동에 귀 기울이고, 오갈 데 없는 난민들을 배척하고, 스스로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야말로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고, IS의 노림수에 말려드는 것이다. 경제난이 장기화하면서 프랑스적 가치인 관용과 연대의 정신이 언제부턴가 빛을 잃고 있다. 파리 테러가 프랑스를 프랑스답게 하는 각성의 계기가 된다면 129명 희생자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