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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 존치론과 개천의 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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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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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지난 13일 의외의 뉴스가 나왔다. “올 사시 합격자 153명 중 연세대 출신이 22명으로 가장 많고 19명인 고려대가 2위, 15명인 서울대가 3위”라는 거였다. 사시 52년 역사상 최다 합격자는 노상 서울대 차지였다. 그러니 서울대가 3위로 밀린 게 선뜻 믿기 힘들었다.

 연세대 측은 “고시반, 사시 특강에다 특별기숙사 제공과 같은 각별한 지원이 낳은 성과”라고 자찬한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아 한 서울대 교수에게 물어보니 해석이 달랐다. “법조인을 희망하는 서울대 출신 다수가 이미 붙었거나 로스쿨에 진학해 응시자가 준 탓”이라는 거였다. ‘끝물’이 된 사시에 매달리는 서울대 출신이 확 줄었기 때문이란 얘기였다.

 사시에 사망선고가 내려진 지는 오래다. 로스쿨 도입 확정 후 2010년부터 합격자를 줄여 나가 내년부터 없어진다.

 그럼에도 사시를 살리려는 움직임은 활발하다. 사시 존치 법안만 6개가 발의돼 18일 공청회가 열린다. 반대도 격렬해 로스쿨생들의 항의시위가 같은 날 예정돼 있다. 온라인 전쟁은 더 심하다. ‘사시충(蟲)’ ‘로퀴벌레’라는 비방이 난무하면서 모욕죄 맞고소가 줄을 잇고 있다.

 전문가들 중론과 다를지 모르나 어쨌거나 여론은 “사시를 살리자”는 쪽이다. 심지어 지난해 5월 조사에선 60.9%였던 존치 찬성이 올 5월엔 74.6%로 늘었다.

 왜 그럴까. 한국인 의식 속에서 자리 잡은 사시에 대한 특별한 의미 때문일 게다. 누가 뭐래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코리안 드림’의 대명사는 사시 합격이었다. 가난한 사시 준비생의 성공보다 더 흔한 드라마의 단골 소재는 찾기 힘들 정도다. 좋은 머리로 노력만 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북돋아줬던 게 사시의 사회적 순기능이었다.

 하지만 로스쿨 도입 이후 이 꿈이 실종된 느낌이다. 실제로 로스쿨제가 “기회 균등에 어긋난다”고 믿는 비율이 60.3%에 달했다. ‘금수저’ ‘흙수저’ 운운할 만큼 신분상승이 힘들어진 요즘이다. 그나마 사시 같은 신분상승용 엘리베이터라도 있어야 보통사람들 숨통이 트이지 않겠나. 게다가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성공 비결을 “미친 듯 공부하면 출세할 수 있는 실력주의”에서 찾았다. 한국판 실력주의의 상징도 사시일 터다.

 물론 사시 폐지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고시 낭인’ 같은 부작용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개천에서 계속 용이 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꿈을 빼앗긴 국민은 절망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