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세 대구시민 “대통령이 찍으라카면 다 찍을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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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보고 찍지, 사람 보고 찍나. 대통령이 찍으라카면 다 찍을끼다.” 9일 오후 대구 서문시장에서 만난 김모(71·서구) 할머니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40년 가까이 이곳에서 닭 장사를 해 온 김 할머니는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서문시장을 다녀간 뒤 “대통령이 그 바쁜 와중에 다녀갔는데”라며 이렇게 말했다. “유승민이가 왜 쫓겨났는지 그런 건 복잡해서 모르겠고…, 내는 솔직히 대통령 고생시러운데 뭐할라고 하나 싶다”고도 했다.

현지에서 만난 물갈이 민심
“경제 애쓰는 의원 하나도 없어”
대학생도 “당 공천자 뽑을 것”
유승민엔 “대통령과 화해했으면”
일부선 “찍어내기 공천 땐 후유증”

 총선도 멀었는데 대구에 물갈이론의 실체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날 대구에서 만난 시민들은 물갈이에 대한 강한 열망을 분출했다. 새누리당 내에서 논의되는 ‘국민공천제’보다는 현역을 심판할 수 있는 ‘물갈이 공천’에 더 지지를 보냈다. 서문시장에서 만난 50대 주부 이모씨는 “고인 물은 썩는다 아입니꺼”라며 “국민이 원하는 건 경제 좀 살려 달라는 긴데 그거 할라고 애쓰는 의원은 한 사람도 안 보여”라고 말했다.

 기성세대만의 정서는 아니었다. ‘젊음의 거리’ 동성로에서 만난 대학생 최모(23)씨는 “저나 친구들이나 대통령이 하려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 생각한다”며 “어떤 식으로든 공천 받은 사람을 뽑아줄 것 같다”고 말했다.

 “당내 공천 과정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박 대통령이 아무리 얘기해도 여의도에서 ‘전략공천’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런 대구 민심 때문인 듯했다. 40대 때 산업재해로 오른팔을 잃어 한 손으로 택시 운전을 하는 한모(66·서구)씨는 “정말 대통령을 깊이 신뢰한다”며 “나라가 잘 안 되는 건 대통령 탓이 아이고 국회의원 탓이죠. 그 양반(대통령) 안타깝잖아요”라고 말했다.

 최근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유일하게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찬성 여론이 높았던 곳(찬성 43%, 반대 42%)이 TK였다는 점도 이해됐다. 택시기사 석동근(64·남구)씨는 “대구에서 국정교과서 반대하는 사람은 무조건 떨차야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대중·노무현이가 검인정제로 바꿀 때는 바꾸는 것도 몰랐다. 이제 그거 쪼매 바로잡겠다는데 말라 반대하노”라고도 했다.

 반면 유승민 전 원내대표에 대한 연민도 존재했다. 물갈이에 대한 일반론적인 지지가 특정인을 표적으로 삼는 것이라면 부정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기류도 꿈틀댔다.

 택시기사 한씨는 동대구역에서 서문시장으로 이동하던 중 “승객한테 유승민이 공천 떨어지면 무소속으로 나올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 그랍니까”라고 물었다. 그러곤 “대구에서 큰 정치인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유승민이 아이면 김문수 아이겠소”라며 “이 사람들이 대통령하고 잘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구대 전영평(도시행정학) 명예교수는 “‘공천=당선’이라는 프레임을 깨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며 “물갈이는 국민의 여망이지만 청와대에서 말하는 물갈이는 자기 사람을 심겠다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전 교수는 “이번에 대통령이 유승민 전 원내대표 부친상에 조화를 안 보낸 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며 “바른말 한다고 찍어내는 식의 공천은 후유증이 클 것”이라고도 분석했다.

대구=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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