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공식’ 합의로 돌파구 … 양안교류 20여 년 만에 ‘시-마’ 3차 국공합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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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3 면

70초 동안 손을 잡은 마잉주와 시진핑(오른쪽).

시진핑(習近平·62)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馬英九·65) 대만 총통의 7일 ‘시마후이(習馬會·대만에선 마시후이)’는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관계 역사에서 획을 긋는 사건이다. 그동안 중국은 ‘하나의 중국(一個中國·One China)’ 원칙을 고수하면서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상회담은 구조적으로 성사되기 어려웠다.


이번 만남은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蔣介石)의 1945년 8월 29일 ‘충칭(重慶) 담판’ 이후 70년 만에 가장 주목받는 만남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장마오(蔣毛) 담판’으로 불린 당시 회동 이후 46년 7월부터 양측은 내전에 들어갔다.


49년 7월 장제스는 난징(南京)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대만으로 옮겼고, 그해 10월 1일 마오가 대륙에 신중국을 세우면서 양안은 공식 분단됐다.


58년 8월 23일부터 10월 5일까지 중공군은 포탄 47만 발을 대만 진먼다오(金門島)에 퍼부었다. 중국의 공세는 78년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노선이 시작될 때까지 20년간 계속됐다.


다시 양안 관계의 돌파구가 열린 것은 92년 11월 홍콩에서 대만의 해협교류기금회(海基會)와 중국의 해협양안관계협회(海峽會)가 ‘하나의 중국’ 원칙에 구두 합의하면서부터다. 당시의 합의를 ‘92공식(共識·컨센서스)’이라고 한다. 92공식에 기초해 93년 4월 27일부터 나흘간 왕다오한(汪道涵) 해협회 회장과 구전푸(辜振甫) 해기회 회장의 역사적 만남이 성사됐고 교류의 물꼬가 터졌다.


양안 관계는 대만 독립 성향을 드러냈던 민진당 출신의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2000년 집권하면서 8년간 파고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마잉주 국민당 주석이 2008년 1월 총통이 된 이후 양안 관계는 해빙기에 진입했다. 특히 2010년에는 ‘양안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불리는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이 체결되면서 ‘차이완(Chiwan) 시대’가 열렸다. 양안의 교역 규모는 2009년 1062억 달러에서 2014년 1983억 달러로 폭증했고 대만 경제의 중국 의존이 심해졌다.


이번 정상회담이 성사되기까지 체제와 이념이 다른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충격파에 완충 역할을 해줄 징검다리 만남이 여러 차례 필요했다. 2005년 4월 당시 야당이던 롄잔(連戰) 국민당 주석이 베이징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났다.


2014년 2월에는 베이징에서 롄잔 국민당 명예주석이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이어 지난 5월 4일에는 시 주석이 베이징에서 대만 집권당 주리룬(朱立倫) 주석을 만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주리룬은 국민당의 차기 총통 후보자가 되기 전이었다.


사실 중국과 대만은 대륙 지배권을 놓고 주도권 다툼을 하면서도 서로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을 반복해 왔다. 1924년에는 군벌 타도를 위해 1차 국공합작을 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1927년 4월 상하이(上海) 쿠데타를 계기로 국공합작이 깨지고 1차 국공내전으로 들어간다.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과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을 일으키자 2차 국공합작이 성사돼 함께 항일 투쟁을 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46~49년 2차 국공내전을 벌였다.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를 앞두고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는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후보가 선두를 달리면서 시진핑과 마잉주가 전격적으로 손을 잡았다. 군벌과 일본에 이어 이번엔 민진당이 3차 국공합작을 자극한 셈이다.


장세정 기자 zh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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