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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눈으로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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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2호 14면

페르시아 시인 니자미(Nizami)의 러브스토리 『하므사』(5부작) 중 1권 ‘호스로와 시린’에 붙은 삽화 ‘목욕 중인 시린 공주를 쳐다보는 호스로 왕자’.

1591년 이스탄불. 한 세밀화가가 살해당한다. 그는 동료 세밀화가들과 함께 술탄의 은밀한 명령에 따라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 뒤 세밀화가들을 지도하던 에니시테마저 살해된다. 연쇄 살인의 이유는 단 하나, 그림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금지된 서양풍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200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소설가 오르한 파묵(63)의 아름다운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살인에까지 이른 그림 그리기를 둘러싼 이야기다. 그림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그림 그리기의 깊숙한 곳에는 예술·종교·신·권력·절대성과 영원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세밀화의 구조 차용한 파묵의 소설살해당한 에니시테는 원근법과 명암법에 입각해 현실을 닮게 그리는 서양 회화의 기법을 도입하려고 했다. 인간이 바라보는 시각을 재현한 원근법에 따르면 실제 크기와 상관없이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인다. 즉, 멀리 있는 태산이 눈 앞에 있는 개보다 작게 그려져야 하며 또 나무 뒤의 가려져 보이지 않는 꽃은 그려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 서양 중세 그림과 이슬람 세밀화에는 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오르한 파묵은 중세 이슬람 문학과 미술의 아름다움을 원용해 이국적인 매력으로 가득찬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 속에서도 반복적으로 인용되는 것은 중세 이슬람문학 최고의 로맨스인 휘스레브와 쉬린의 사랑이야기다. 휘스레브가 목욕하는 쉬린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을 그린 이 세밀화에는 원근법 없이 모든 것이 나열되어 있다. 주인공뿐 아니라 바위나 나무, 시냇가의 작은 꽃들과 풀 한 포기마저도 숨막힐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신은 작은 미물 하나도 놓치지 않으며, 신의 품속에서 모든 것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에 우아하게 쓰인 텍스트는 이 장면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림은 터져나갈 것 같은 세부들로 가득 차 있지만, 각각의 존재들이 그림의 조화를 해치지 않는다.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이런 세밀화의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문학작품을 흔히 1인칭 시점, 2인칭 시점, 3인칭 시점으로 분류하는 것은 바라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원근법이 가진 인간중심적인 사고와 병행하는 것이다.


파묵의 소설에서는 죽은 사람도, 값싼 종이에 그려진 한 마리 개나 나무도, 금화도, 살인자도, 죽음도, 빨강색도 자기 말을 한다. 빛나는 세부들이 큰 그림 속에서 조화를 이루듯, 그의 소설에서는 모두 당당하게 자기 말을 하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소설 말미에 이르기까지 살인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독자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눈치채기 힘들다. 범인이 자기 얼굴을 꽁꽁 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말투와 개성적인 스타일을 숨겼기 때문이다. 개성과 스타일을 억제하는 것은 이슬람 세밀화들의 미덕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세밀화 속 잘 생긴 휘스레브가 타고 있는 말은 여인처럼 가냘프고 우아한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말은 눈 앞에 있는 말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신이 원하고 보았던 말을 그린 것이다. 이 지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옛 장인들은 50년 동안 쉬지 않고 말을 그렸다. 50년 동안 정성으로 말을 그리다 보면 눈은 장님이 되고, 손이 저절로 말을 그리게 된다.


또 휘스레브가 목욕 중인 쉬린의 아름다움에 놀라 손을 입에 넣고 있는데, 놀라움을 나타내는 이 동작 역시 200년 넘게 이슬람 각 지역에서 수없이 그려졌다. 똑같은 그림과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무상한 시간의 흐름의 흔적을 없애는 방법이다. 이로써 그들은 시간을 초월한, 신적인 “절대적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경지에 이른 장인은 눈이 멀게 된다고 한다. 행복한 ‘눈멈’은 “지극의 아름다움을 보았던 눈이 세속의 더러움으로 오염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일종의 ‘신이 내리는 선물’이라 여겨졌다. 영원과 절대적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슬람 세밀화가들에게는 과거를 반복하는 것만 가능할 뿐, 서양 화가들이 추구하는 새로운 창안과 개성적인 스타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중세를 무너뜨린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그러나 개성적 스타일을 중시하는 서양 화풍에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 담겨 있었다. 늘 똑같은 이야기와 그림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할 수 없다. 그런데 서양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의 주인공은 신도 술탄도 아닌 평범한 귀족들로, 그들은 그림의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중세 시대 특정인들만 누리던 특권과 영원함을 갈망하던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의 개화는 개인주의의 발화지점이 된다. 이것은 중세의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힘, 개인의 문화사적 등장을 의미한다.


살해당한 에니시테는 오래전부터 이런 욕망이 야기하는 문제를 잘 알고 있었기에, 조카 카라가 딸 세큐레와 사랑에 빠지자 카라를 추방해버렸다. 카라는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며 세큐레에게 그림을 한 장 그려주었다. 휘스레브가 쉬린의 창가로 다가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인데, 쉬린의 얼굴은 어쩐지 세큐레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사랑은 한 사람을 영원히 배타적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갈망이기에 개인적이고 개성적일 수밖에 없다. 개성적인 것은 신의 절대성 관점에서 보면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그러던 에니시테 역시 서양 초상화의 마력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하나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질서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순수해 보인다. 그러나 개성적인 것은 상대적이고 무한하다. 그러므로 이곳은 모든 것이 제각각인 무질서가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며 불순해 보인다. 그러나 개성을 가진 개인들이 등장하면서 단일성에서 다양성으로 나가는 것이 근대화의 방향이다.


소설 속에서는 새롭고 이질적인 것의 수용을 거부하고 이슬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이 내지르는 선동의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높아져 간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불순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절대적 단일성을 추구하는 문화는 결과적으로 모든 자연스러운 발전을 왜곡시킨다. 절대성에 도달한 대가로 주어지는 행복한 ‘눈멈’을 얻지 못한 나이 든 장인들은 가짜로 장님인 척하는 위선에 빠졌다.


살해당한 에니시테가 마지막 순간에 본 것은 ‘빨강’이다. 빨강은 “사방을 뒤덮은, 그 안에 세상의 모든 모습이 함께 있는” 멋지고 아름다운 색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을 만난다. 이슬람 관습에 벗어난 서양화풍 이교도의 그림을 그렸다는 고백에 신은 대답한다. “동방도 서방도 나의 것이다.”


진정, 신의 말이다. 에니시테가 빨강을 보고 신을 만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빨강이야말로 뜨거운 피를 가진 인간의 색이다. 시간 속에 있는 인간들은 신을 예찬하는 방식조차 시간 속에 있다. 따라서 부단히 변화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슬람 세밀화의 스타일도 부단히 변해왔으며 여러 이질적 화풍과 섞이면서 더 좋게 발달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이슬람 화풍도, 서양 화풍도, 동양 화풍도 모두 각각의 존재 의미를 갖는 아름다운 그리기 양식들이며,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동방도 서방도 나의 것”이라는 신의 말은 세상 모든 것은 존재의 의미가 있고, 부분적인 진실만을 담아낼 뿐이니, 모든 것이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진정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이자 개방된 이슬람 국가, 터키 출신 작가다운 멋진 결론이다. 에니시테의 마지막 기도는 이것이었다. “신이여, 순수함을 향한 의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소서.” ●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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