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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의 시대공감

고구려의 말굽소리를 듣다

중앙일보

입력

가파른 절벽 위에 왕관처럼 우뚝 솟은 성.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는, 하늘이 내린 성이다. 중국 랴오닝성 환런(桓仁)현에서 20리 가량 버스로 달리자 산 너머 솟구치듯 성이 떠올랐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다.

랴오닝성 고구려 유적지 훼손 심해
동북공정 탓 중국 일부로 꾸미기도
고증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학자들
중국 방해 이기고 역사 복원해주길

사방이 병풍을 세워놓은 듯 깎아지른 절벽이다. 서문 쪽 가파른 계단을 디디고서야 겨우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해발 820m. 땀을 쏟고 올라가니 환런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광개토왕비에 홀본(忽本)이라고 기록된 땅이다. 성 아래 태극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은 비류수(渾江).

고구려 사람들은 성을 잘 쌓는다. 산성과 평지성을 한 쌍으로 유지했다. 평지성에서 생활하다 위기에는 산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장대에 올라서니 북소리처럼 울리는 주몽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요동 벌판을 달리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의 활 솜씨에 누가 당할 수 있었으랴.

선양(瀋陽)에서 번시(本溪)로, 번시에서 환런, 지안(集安), 단둥(丹東)으로 달렸다. 이 낯선 지역이 오히려 고향처럼 푸근하다. 그리 높지 않으면서 시야를 떠나지 않는 산들, 맑은 강, 낯익은 나무들….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혼강은 한강을 닮았다. 흘승골성 주거지에는 쪽구들이 놓여 놓여 있다. 우리 민족만 쓰는 온돌이다. 흘승골성과 짝을 이루는 평지성 홀본으로 추정하는 하고성자(下古城子) 마을에는 볏단이 쌓여 있다. 쌀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역사가 사라질 위기라는 점이다. 중국 정부의 동북공정 때문이다. 한국 정부의 항의로 이제 노골적인 발톱은 감추었다. 대놓고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써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교묘한 손길이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다.

국내성이 있는 지안의 고구려박물관을 들어서면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운데에 작은 삼발이 솥을 배치해놨다. 삼발이 솥은 중원문화의 상징이다. 서울에서 독일의 쌍둥이 칼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런데 큰 흐름과 관계없는 삼발이를 유독 중심에 놓아 전체가 중원 문화에 뿌리를 둔 듯이 느끼게 한다.

고구려 고분의 수렵도 가운데에도 뜬금없이 중원의 수렵도가 붙어 있다. 이곳에서 발굴된 것도 아니고, 닮지도 않았는데 굳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한 것이다. 고구려 왕의 계보도를 그리면서도 맨 앞에 중원 왕조를 기준으로 써놓아 은근히 고구려를 지방정부로 느끼게 한다.
사서(史書) 인용도 중원에 패하고, 굴복한 듯한 대목만 따놓았다. 고구려는 중원과는 다른 세계였다. 북위와 후연, 송과 함께 4국이 팽팽하게 견제하며 자기 영역을 지켰다. 그런 중 무구검(毋丘儉)의 침략 기록만 들춰내 고구려사 전체가 중원문화의 일부인 양 부각하는 수법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대응에는 어려움이 많다. 기록과 유물이 모두 중국에 있기 때문이다. 일부 북한 유물도 접근이 어렵다. 사서와 비문(碑文), 문집(文集)이 모두 중국 말로 돼 있다. 소재 파악도 어렵고, 그 많은 기록을 해독할 인력, 연구자도 없다.

한국 학자는 요시찰 대상이다. 이번에 필자가 동행한 고구려 답사단에는 체류기간 내내 감시원이 따라 붙었다. 공안과 군기관원이다. 심지어 장군총에서는 공안이 중국인 안내원을 통해 답사단 신분을 탐문해 항의하기도 했다. 동행한 한 고구려 전공 학자는 올 때마다 감시를 받는다고 했다. 필름을 뺏기고, 추방당한 학자도 있다. 일부 학자에게는 아예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조작 가능성에도 무방비다. 흘승골성을 확인한 것은 1996년부터 중국측이 1000점이 넘는 유물을 발굴하면서다. 그 이전에 유물이 한 점도 나오지 않았던 곳이다. 물론 5단으로 쌓인 문화층을 깊이 파낸 점도 있다. 하지만 유물 한두 점 섞어놓아도 알 수 없다. 하고성자(下古城子) 적석총은 몇 년 전 흩어진 돌을 주민들이 임의로 끌어 모아 쌓는 것을 우리 학자가 봤다고 한다.

훼손은 더 문제다. 국내성은 흔적만 남았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노숙했다고 쓴 구련성(九連城)은 표지석만 움막 같은 화장실 옆 오물 속에 파묻혀 있다. 박작성으로 추정되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은 완전히 중국풍으로 복원됐다. 장군총은 한쪽 귀퉁이가 주저앉고 있고, 환런 댐에는 수천 기의 고구려 돌무덤이 잠겨 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버티는 우리 학자들의 사명감은 참으로 놀랍다. 이쑤시개로 장검에 맞서며 중국의 왜곡을 견제하고 있다. 의욕만 앞세워 빌미를 주지 말고, 탄탄하게 다져가며 자랑스런 우리 역사를 복원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중국 선양에서)

#김진국 #랴오닝성 #고구려 #흘승골성 #동북공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