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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금요일] 외설과 지성의 줄타기…플레이보이의 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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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9월.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두고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지미 카터의 '충격 고백' 때문이다. 카터는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결혼한 뒤에도 예쁜 여자를 보는 순간 욕정을 느꼈다. 마음의 간음도 여러 차례 저질렀다. 하느님은 내가 앞으로도 그런 생각을 할 거고 과거에도 그랬다는 것은 알지만 용서해 준다"고 말했다.

당시 무명이던 카터는 침례교 신자로 '정직한 아웃사이더'와 개혁가의 이미지를 앞세워 당내 다른 유력 후보를 제치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그런 그의 입에서 '간음'과 '욕정'이라는 파격 발언이 나오자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전통주의자와 종교 보수주의자는 그를 '위선자'라고 공격했다. 선거 판세도 혼란이었다. 얼마나 비난이 컸으면 카터가 언론과 다시는 인터뷰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였다. 이런 역풍 속에도 카터는 공화당 후보였던 제럴드 포드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백악관 입성에 성공했다. 유권자들은 그의 솔직함을 받아들인 셈이다. 지미 카터에게는 악몽이었던 이 인터뷰가 실린 잡지가 '플레이보이'다.

"죽음은 삶의 가장 멋진 발명품이다."
2011년 세상을 뜬 애플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이런 축사를 했다. 이 말은 이 해 가장 유명한 졸업식 축사로 꼽혔다. 잡스는 정작 이 말을 85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스탠퍼드대 졸업식 축사는 이 인터뷰의 재생판에 불과하다. 잡스가 인터뷰한 그 잡지가 '플레이보이'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헷갈린다. 플레이보이는 어떤 잡지인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플레이보이를 펼치면 여성의 누드 사진이 나온다는 걸. 그래서 많은 남성, 심지어 일부 여성도 플레이보이를 찾았다. 여성의 누드에 집중하면 플레이보이는 도색잡지라 불릴 만 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카터와 잡스는 물론 내로라하는 세계의 명사들이 플레이보이 인터뷰에 등장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도래를 선언한 레슬리 피들러의 평론 '경계를 넘고 간극을 메우며'가 발표된 곳도 플레이보이다. 이런 텍스트만 보면 플레이보이는 고품격 지성지다. '외설과 지성'이라는 교묘한 접촉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왔던 플레이보이, 이 잡지가 인터넷 시대에 변신을 하겠다고 나선 건 놀라운 도전이다.

50년대에 '에스콰이어'잡지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휴 헤프너는 회사가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옮기자 실직했다. 그는 직접 잡지를 창간하기로 결심한다. 53년 봄이었다. 헤프너는 팔리는 잡지를 만들 줄 아는 인물이었다. 유통업자에게서 선주문을 받았다. 이때 역사에 길이 남을 신의 한 수를 둔다. 영화 '이브에 관한 모든 것'과 '나이아가라' 등으로 일약 할리우드 최고 섹시스타로 떠오른 메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 해 11월 미소짓는 먼로의 사진이 표지를 장식한 창간호가 나왔다. 먼로의 누드 사진은 속지를 장식했다. 창간호는 5만4000부나 팔렸다. 광고와 홍보없이 신생지가 거둔 놀라운 성과였다. 출간 3년 만인 56년 플레이보이 발행 부수는 월 110만 부로 폭등했다. 매출은 350만 달러에 이르렀다. 헤프너는 미국 미디어 업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온갖 비판이 뒤따랐다.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조악하게 상품화해 여성을 격하했다는 비판이 넘쳤다. 그럼에도 플레이보이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거나 첨예하고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는 토론의 장을 자임했다. 미국 사회에서 화제의 중심에는 늘 플레이보이가 있었다.

헤프너의 철학은 분명했다. "플레이보이는 도시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세련된 엔터테인먼트 잡지다. 기본 판매는 여자 누드사진이 보장할 테지만, 유명 작가의 작품을 싣고 고품격을 유지할 것이다." 누드 사진은 '미끼 상품'인 셈이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아메리쿠스 리드 교수는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플레이보이의) 수준 높은 콘텐트는 언제나 누드 사진에 가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플레이보이의 유명 인사 인터뷰는 유서 깊다. 자와 할랄 네루 인도 총리와 피델 카스트로 쿠바 총리,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목사,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 존 레논과 오노 요코, 비틀스, 구글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 등 다양한 인물의 심도 깊은 얘기가 지면을 장식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의 인터뷰가 실린 플레이보이는 레논이 살해당한 그 날 가판대에 나왔다.

세계 문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가들도 플레이보이의 단골 손님이었다. 마가렛 앳우드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SF의 거장 아서 클라크와 필립 딕, 최근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까지 플레이보이에 작품을 게재했다. 휴 헤프너의 전기『미스터 플레이보이』의 작가 스티븐 와츠는 "플레이보이는 미국의 변화를 측정하는 바로미터이자, 각종 사건을 아로새기는 서판(書板)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창간 62년 만에 "내년 3월호부터 누드 사진을 게재하지 않겠다"고 플레이보이가 밝힌 배경에는 이런 콘텐트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클릭 한 번으로 공짜 누드 사진과 동영상을 볼 수 있는 디지털 세상에서 여성의 벗은 몸으로 돈 벌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72년 11월 720만부의 기록적인 발행 부수를 기록했던 신화가 올 6월말 현재 발행부수는 80만 부로 사그라들었다. 스콜 플랜더 최고경영자(CEO)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플레이보이의 해외판 등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을 감안하면 흑자지만, 미국판은 연간 30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콘텐트의 힘'은 벌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온라인 실험이 순항 중이다. 플레이보이는 지난해 8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누드 사진을 삭제하고 고급 인터뷰 기사 등 읽을거리를 강화했다. 그 결과 월간 홈페이지 방문자 수는 400만명에서 1600만명으로 4배로 늘어났다. 독자의 나이도 평균 47세에서 30세로 낮아졌다.

그룹의 수익 구조에서 잡지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 점도 누드를 버리게한 요인이다. 플레이보이는 71년 뉴욕 증시에 상장했다. 하지만 헤프너 등이 2011년 지분을 다시 사들여 비상장회사로 전환한 탓에 수익 구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2009년 플랜더 CEO가 취임할 당시 2억4000만 달러에 이르던 매출은 올드 미디어 사업을 과감히 정리한 3년 뒤 1억3500만 달러로 줄었다. 하지만 이익은 2009년 1930만 달러에서 2012년 3890만 달러로 배로 늘었다. NYT에 따르면 플레이보이 그룹의 주요 수익은 바니 로고와 브랜드 라이선스 수익, 유료 TV 등에서 나온다.

플레이보이의 아트 디렉터 아트 폴이 53년 디자인한 바니 로고는 2015년 포브스 브랜드 가치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애플의 브랜드 가치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됐다. 턱시토 타이를 매고 귀를 쫑긋 세운 토끼 로고는 지적 호기심을 갖고 우아하지만 놀기 좋아하는 말썽꾸러기를 상징한다. 성적인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플레이보이의 전성기 때는 독자가 주소를 적지 않아도 로고만 있으면 잡지사로 편지가 배달될 정도였다.

누드 사진을 버린 플레이보이는 회사의 기반이던 백색 가전을 일렉트로룩스에 팔고 에너지 전문기업으로 변신한 GE나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기업 컨설팅 정보기술(IT) 서비스 회사로 탈바꿈한 IBM의 시도에 비견할 수 있다. 결과는 아직 모른다. 플랜더 CEO는 "'이 실험은 누드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답안지는 내년 3월 이후에야 받아볼 수 있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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