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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교과서란 무엇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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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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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소설가

교과서는 정설을 설명한 책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회철학 교과서인 『논어』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원래 유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하나였고, 공자의 불우한 생애가 말해주듯 춘추전국시대에 세력이 컸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漢) 이후 유가가 한문 문명권의 정설로 자리 잡자 『논어』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교과서가 되었다.

 정설을 설명한 책이므로, 교과서는 사회화에 기여한다. 시민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녀야 할 표준적 지식을 갖추는 데 교과서는 긴요하다.

 사회화에 대한 기여는 초·중등 교과서에서 두드러진다. 학생들은 정부의 교과과정에 맞게 씌어진 교과서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필수 지식을 배운다. 가정에서 배운 기본 지식에 이런 필수 지식이 더해지면서 학생들은 원숙한 시민으로 자란다.

 초·중등 교과서는 정설에서 사회화에 긴요한 지식만을 추려서 담는다. 즉, 교과서는 본질적으로 표준화를 지향한다. 학생들이 다양한 견해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교과서의 본질을 간과한 데서 나온다. 다양한 견해를 비교해서 판단하는 것은 사회화의 기본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전문 분야에서 누리는 지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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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공급은 시장이 잘한다. 따라서 정부의 교과과정에 맞는 교과서가 많이 나와서 소비자들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선택을 통해 끊임없이 향상되도록 하는 검정 방식은 합리적이다.

 현실은 다르다. 먼저, 적절한 교과서가 공급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의 경우 대한민국의 정통성, 뛰어난 성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우수성과 같은 기본 사항들을 제대로 설명한 교과서들은 드물다. 거의 다 사실들을 교묘하게 비틀어 대한민국의 역사를 폄하한다. 어린 학생들의 사회화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사회적 생각들을 심어준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게다가 교과서 채택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권한이 없다. 교원노조의 영향력이 큰 학교에서 교사들이 고른 교과서를 학생들이 배운다. 어느 사회에서나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맡겨진 볼모들이므로 학부모들은 그저 탄식할 따름이다. 모처럼 대한민국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그린 교과서가 나오자 좌파 지식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온갖 트집을 잡아 몰아냈다.

 거래가 자유롭고 가격과 품질에 의한 경쟁을 통해 보다 나은 제품들이 지속적으로 나오는 시장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시장 실패’라고 부르지만 그런 말을 들먹이기 민망할 만큼 중등 교과서 시장은 열악하다.

 시장 실패의 해결책은 정부 개입이다. 독점이 나오면 정부가 나서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유도하고, 환경이 오염되면 줄일 길을 찾는다.

 즉, 국정화는 시장 실패를 바로잡는 합리적 절차다. 독점이나 오염 같은 시장 실패에 정부가 나서는 것과 똑같다. 정부가 어린 학생들의 사회화라는 목적에 맞는 역사 교과서를 직접 공급하는 것이다.

 시장 실패에 따른 정부 개입은 시장 설계(market design)로 마무리된다. 시장이 제대로 움직여 점점 나은 제품들이 공급되려면 소비자들이 제품을 자유롭게 고를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경우 교과서를 직접 공급하는 응급조치를 한 다음 정부는 교과서의 선택에서 소비자들인 학부모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원래 검정 방식은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전제로 삼는다. 이 전제가 충족되지 않은 것이 이번 파동의 근본적 원인이다. 학교마다 학부모들이 교사들의 전문적 의견을 참고해 국정교과서와 검정교과서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고르게 된다면 이번 파동은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것이다.

 이런 조치는 교과서들의 지속적 개선에 대한 궁극적 보장이다. 정권은 바뀌지만 부모 마음이야 바뀔 리 없다. 자식들이 반사회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다. 극단적 반미주의자들도 자식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에 유학을 보냈고, 군대는 카투사에 보냈다. 그게 부모 마음이다.

 아울러 학부모들이 교과서를 고르도록 하는 조치는 출판사와 교사들의 담합을 줄여 교과서 시장을 깨끗이 할 것이다. 학부모들이 급식 기업을 고른다면 배 아프게 만드는 음식을 학생들이 먹겠는가?

 이런 조치는 모든 교과로 확대돼야 한다. 어린 학생들의 사회화를 방해하는 교과서가 많고 전반적으로 수준이 낮다. 교사들의 이념적 편향이나 출판사의 영업 능력이 교과서의 채택을 결정하는 한 사정은 나아지기 어렵다.

 경제 활동의 목적이 소비이므로 소비자의 자유로운 선택은 매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생각해 보면 교육의 소비자들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돌려주는 것은 교육 개혁의 요체이기도 하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