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적과의 교감 … 스필버그와 행크스 휴머니즘으로 뭉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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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주인공 도너번(톰 행크스)은 소련 스파이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몰린다. 총기 습격까지 당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그는 인권을 향한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사진 20세기폭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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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진 1960년대 냉전 시대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캐치 미 이프 유 캔’ ‘터미널’ 등 스티븐 스필버그(69) 감독과 배우 톰 행크스(59)의 만남은 한 번도 관객의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다. 둘이 ‘스파이 브릿지’(5일 개봉)로 또 한 번 의기투합했다. 스필버그는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스파이를 맞교환했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를 감동적으로 스크린에 불러냈고, 톰 행크스는 언제나 그랬듯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신념있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톰 행크스, 외압에도 신념의 얼굴
60년대 미·소 스파이 맞교환 다뤄
베를린 장벽 274m 그대로 재현
스필버그 “관용 없는 세상에 경종”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을 체포한 미 당국은 적국 스파이에게도 정당한 재판 기회를 주는 ‘우월한 체제’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위해 보험전문 변호사 제임스 도너번(톰 행크스)을 아벨에게 선임해준다. 도너번은 적국 스파이를 변호하는 반역자라는 비난 속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벨을 변호하며 “스파이도 변호받을 권리가 있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나중에 아벨을 소련에서 체포된 미국 스파이와 맞교환할 수 있다는 도너번의 예측대로 미국의 U-2 정찰기 조종사 개리 파워스(오스틴 스토웰)가 소련 당국에 체포되자, 미 정부는 도너번에게 아벨과 파워스를 맞교환하는 극비 임무를 부여한다.

 영화의 출발점은 유명 극작가 맷 차먼이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전기를 읽다가, 도너번 변호사가 1962년 쿠바에 가서 미국의 피그만 침공 때 체포된 1200여 명의 포로 석방 협상을 성공적으로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다. 맷 차먼은 도너번이 쿠바 협상 이전에 미·소 스파이 맞교환도 성사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이를 토대로 코엔 형제와 함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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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 감독

 실화의 힘에 매료돼 메가폰을 잡은 스필버그 감독은 “이 영화의 스파이는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라며 “선악의 흑백 논리에 빠져 악당으로 결론 내린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요즘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소련 스파이 아벨을 ‘뿔 달린 괴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임무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함께 예술가적 면모와 연륜을 지닌 아벨은 자신을 변호해주는 또 다른 신념의 소유자 도너번과 인간적인 교감을 나눈다. 도너번은 “철의 장막 어느 편에 놓여 있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며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협상을 밀어붙인다. 스필버그는 그의 모습을 통해 편견과 증오에 맞서 인권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미국뿐 아니라 인류를 위대하게 만드는 진정한 가치’라고 역설한다. 야만과 폭력의 역사 속에서 더욱 빛나는 고귀한 휴머니즘을 영화 속에 꽃피워 온 스필버그가 도너번을 ‘쉰들러’와 ‘링컨’에 이어 또 다른 영웅으로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다.

 영화의 또 다른 성취는 냉전시대 엄혹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밀도있게 재현해냈다는 데 있다. 냉전시대 유년기를 보냈던 스필버그는 미국의 U-2 정찰기가 격추당한 직후 소련에 출장을 다녀왔던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당시 소련의 격앙된 분위기, 언제 핵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욕조에 물을 가득 채워놓곤 했던 기억을 생생하게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특히 베를린 장벽 재현에 공을 많이 들여, 실제 베를린 장벽에 쓰였던 재료를 사용해 길이 274m에 이르는 장벽을 쌓았다. 스필버그의 역사극은 미국의 이념적 패권주의를 대변한다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스파이 브릿지’는 그런 비판에서 자유로울 듯하다. 냉전보다 더 냉혹한 상황에서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한 남자의 용기를 통해 인간답다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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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개 만점, ☆는 ★의 반 개

★★★★☆(영화 칼럼니스트 김혜선): 스필버그의 ‘변호인 퍼스트 클래스’. 클래식하다는 단어에 낡음 대신, 신념과 품격을 돌려준 스파이 영화. 톰 행크스의 선한 가장 연기도 간만에 신선하다.

★★★★(고석희 기자):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스필버그식 휴머니즘이 빛을 발한다. 아벨이 도너번에게 들려준 ‘오뚝이’ 이야기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되풀이되며 감동과 전율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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