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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웃을 일 없는 당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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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신예리 기자 중앙일보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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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리
JTBC 국제부장
밤샘토론 앵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한 왕국에 공주 자매가 살고 있었어요. 신은 공평하신지 언니 공주에겐 미모를, 동생 공주에겐 재치를 나눠 주셨답니다. 성에서 잔치가 열리면 이웃 나라 왕자들이 처음엔 다들 언니 주위로 몰렸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나둘 동생 곁으로 발길을 돌렸다네요. 예쁜 얼굴엔 잠시 홀릴 뿐이지만 즐거운 대화는 오래오래 즐기고 싶으니까요’.

 어릴 적 읽었던 동화의 줄거리다. 저자도 제목도 가물가물하지만 교훈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여자는 외모보다 유머”란 거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결심한 건. 노래할 때 ‘공기 반 소리 반’을 내야 하듯 난 대화할 땐 ‘농담 반 진담 반’을 추구하곤 한다. 아무리 진지한 회의에서도 최소한 한 번은 좌중이 폭소를 터뜨리게 해야 직성이 풀린다. 맞다. 난 좀 ‘웃기는’ 여자다.

 웃는 짐승도 몇몇 있다지만 웃음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만드는 특징이다.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웃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왜 그럴까. 웃음은 사회적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남을 웃게 만들려 애쓰는 것도, 남의 말에 잘 웃는 것도 모두 “너랑 잘 지내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란 얘기다. ‘재미있는 남자’와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 주는 여자’가 동서고금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건 그래서일 게다.

 그럼 나처럼 재미있으려고 노력하는 여자 역시 좋게들 봐주려나. 꼭 그런 것 같진 않다. 앞서 소개한 교훈적인 동화와 달리 “여자는 유머보다 외모”인 게 냉정한 현실이다. “유머는 지성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똑똑한 여자를 기피하듯 웃기는 여자도 기피한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유머의 관객이 되길 원하지 주체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미국의 저명한 논객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논쟁』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만약 그가 맞는다면 난 완전히 헛다리 짚은 거다.

 하지만 어쩌겠나.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도, 몸에 밴 습관을 쉬이 버릴 수도 없으니 그냥 살던 대로 살려 한다. 자기 정당화를 해 보자면 여자든 남자든 남을 웃게 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이타적인 존재 아니겠나. 웃음이 최고의 명약이라는데 그 좋은 걸 남들에게 공으로 베푸니 말이다. 평소 개그맨들을 높게 평가하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에게 많은 웃음을 준 만큼 두고두고 복 많이들 받으실 게다.

 반면 우리 정치인들은 욕먹어도 싸다. 정치를 잘해서 국민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지 못할 거면 적어도 유머감각이라도 높여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입만 열면 어찌 그리 그악스러운 말들만 퍼붓는지… 서로 비판을 해도 때론 헛웃음이라도 짓게 해학의 정치를 보여 줄 순 없는 걸까. 얼마 전 바다 건너 과테말라에서 코미디언이 대통령으로 뽑힌 걸 결코 코미디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20년 동안 사람들을 웃겨 왔다. 대통령이 되면 절대 국민을 울리진 않을 거다.”(지미 모랄레스 과테말라 대통령 당선인)

 미국엔 대통령의 유머감각과 업무 수행 성적이 정비례한다는 통념까지 있다. 숙적이던 더글러스 의원에게 ‘두 얼굴의 이중인격자’라 공격받은 링컨 전 대통령. “만일 제게 다른 얼굴이 있다면 지금 이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색하는 대신 스스로 못난 걸 인정하는 ‘자학 개그’로 상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시쳇말로 ‘다큐를 예능으로 받아친’ 거다. 잘생긴 케네디 전 대통령 역시 자기 비하 유머를 구사한 바 있다. 트루먼 전 대통령과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 뒤 한 소리다. “트루먼이 저더러 ‘개자식’이라고 한 걸 사과해야 합니다. 그럼 전 제가 ‘개자식’인 걸 사과할 겁니다.”

 입만 아픈 정치 얘긴 이쯤 하고 우리부터 잘해 보자. 특히 사랑의 유효기간이 한참 지난 중년 이후의 부부에게 유머는 필수다. 늙어서 돈도 없고 힘도 빠진 남편이지만 “웃겨서 데리고 산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Y 선배. “여보, 내가 잠옷 차림이라 복장이 불량하니 택배 문 좀 열어 줘요”라고 청하면 “나는 날 때부터 용모가 불량하니 당신이 나가요” 한다나. 화를 내려다가도 피식 웃음이 나온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주 헛짚은 건 아닌 것 같다. 젊음의 우위를 잃고 나면 그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텐가. 미모는 한때지만, 유머는 영원하다.

신예리 JTBC 국제부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