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자유주의 위축 속 고개 든 아시아 모델 … 우월론 아직 일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51호 14면

중국 상하이(上海)의 루자쭈이(陸家嘴) 금융가 마천루 사이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최근 성장세가 주춤하지만 중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의 30%를 점유하고 있다. [블룸버그]

요즘 자본주의처럼 혼란스러운 단어도 없다. 자유시장경제와 거리가 먼 중국이 세계 투자를 주도하는 것도 모자라 자국 중심의 경제체제까지 거론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미국에서도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기존의 주주 자본주의를 대체할 창업자 중심의 새로운 지배구조를 모색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했던 냉전시대에도 자본주의 내부의 다양성은 존재했다. 영미식 신자유주의와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분명히 달랐다. 특히 관 주도, 가족경영을 기반으로 한 아시아식 자본주의는 유별났다. 애초부터 서양 따라잡기를 목표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단계를 거친 동아시아의 자본주의는 그 지향점부터 달랐다.


1997~98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발하며 서구 주도의 시장 개방과 금융규제 완화가 컨센서스로 떠오르는 듯했다. 하지만 2007~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고삐 풀린 월가의 이윤 지상주의가 철퇴를 맞았다. 그 틈을 타고 ‘아시아 모델’을 재평가하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키쇼어 마부바니 전 유엔 주재 싱가포르 대사는 “아시아식 자본주의는 자유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좋은 거버넌스의 ‘보이는 손’에 의해 균형 잡히는 우월한 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럼 아시아 자본주의는 과연 지속 가능할까. 세계의 다양한 자본주의 체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지난달 22~23일 서울대에서 ‘자본주의와 아시아의 자본주의들: 근원, 공통점 그리고 다양성’이라는 주제의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사회과학협의회와 서울대 아시아연구소가 주최한 이번 심포지엄에선 정부와 기업의 관계, 노동시장, 기업 지배구조 등에 나타난 아시아 자본주의의 특색이 논의됐다. 이 가운데 아시아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정부·기업 간 네트워크에 대한 논의 내용을 소개한다.


마르쿠스 폴만 독일 하이델베르크대(막스 베버 사회학연구소) 교수는 “신자유주의가 아시아 국가에서 뿌리내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외환위기 이후 특히 금융 부문에서 정부가 실패를 인정하고 물러나는 듯 보였지만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다. 관료는 여전히 금융회사를 틀어쥐고 있고,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는 손에 꼽을 정도이며, 주주 이익 실현이나 노동시장 유연화 분야에서도 서구 자본주의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아시아 국가에서 명문대의 지위, 기업 간 공조, 발전국가 시스템 등 ‘보완적인 사회기구(complementary societal institutions)’는 퇴보했다. 하지만 평생 고용, 대기업의 문어발식 경영, 정부와 기업 간의 비공식적인 공생관계 같은 ‘조직적 기구(organizational institutions)’들은 건재하다고 한다. 발전국가의 외형은 사라졌지만 조직적 기구의 권력독점과 ‘국가 대계’ 등의 정책수립 방식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앨빈 쑤(蘇耀昌) 홍콩과기대 교수는 중국식 자본주의의 급부상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중국의 자본주의 발전이 당 중심, 지방분권의 형태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이나 소련·동구권 경제개혁과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또 앞으로 중국이 직면할 도전도 다르다고 덧붙였다. ‘선진국 따라잡기’에서 ‘패권국가’로 넘어가면서 ▶성장률 유지 ▶패권 갈등 ▶공산당 지지기반 변화 등의 과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패권 유지를 목표로 삼는 이상 세계경제의 갈등·불확실성·혼돈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쑤 교수는 주장했다.


시미즈 다카시(淸水剛) 도쿄대 교수는 아시아 가족경영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본의 자이바쓰(財閥) 시스템의 원리를 소개했다. 미쓰비시(三菱)·스미토모(住友) 등 자이바쓰들은 1920년대 합명 또는 합자회사 형태로 운영됐다. 이런 형태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재현된 것처럼 오너의 직원에 대한 신뢰와 책임의 발로라는 게 시미즈 교수의 해석이다. 합명·합자회사는 거의 화석화된 방식이지만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 속에서 직원의 삶과 회사 생활을 동일시하는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고 시미즈 교수는 설명했다.


한편 국내 학계에선 아시아 자본주의에 대한 유보적인 평가도 많다. 중국이 떠오르면서 아시아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각광받고 있지만 앞으로 겪어야 할 갈등과 시행착오가 여태껏 이룬 것보다 더 많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이국영 성균관대 교수는 “서구 자본주의와 일본·한국·대만·중국의 자본주의는 각각의 발전단계와 내용이 워낙 달라 단순히 지역적으로 구분하기는 어렵다”며 “동아시아의 부상은 분극화(중심부-주변부로 세계가 분화돼 갈리는 구도)에서 균등화로 가는 경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