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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에 집중하는 한국 관객 지적이면서 감성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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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호 8 면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44)이라는 이름이 한국의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처음 알려진 건 1980년대 후반 음악 월간지에 실린 라이선스 음반의 광고면을 통해서다.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44),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41)와 함께 ‘소련 3대 신동’이라는 마케팅 수사가 여러 곳에 실리면서 레핀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늘었다. 접할 만한 정보가 몇몇 마이너 레이블 음반밖에 없으니 신비감은 더욱 커졌고 벤게로프가 1996년 첫 내한 공연에 성공을 거두자 다음 순서는 자연스레 레핀이었다.


97년 드디어 레핀이 독주회로 한국을 찾았고 예술의전당엔 음악 기자들과 지금은 작고한 음악 평론가,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고전음악 동호회원들이 모였다. 힌데미트 바이올린 소나타로 시작해 브람스, 그리그, 라벨로 이어지는 공연이 끝났고, 회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입에선 이구동성으로 “괴물”이란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의 이름이 인구에 다시 회자된 것은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로 있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36)와의 결혼 덕분이다. 인류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최정상급 예술가 커플의 탄생에 세계가 주목했고, 이들 커플은 자신들의 명성을 이용한 새로운 공연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다.


호주를 대표하는 시드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31일 예술의전당 무대 협연을 위해 내한하는 바딤 레핀을 중앙SUNDAY S매거진이 런던에서 먼저 만났다.

바딤 레핀 (Vadim Repin) 1971년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출생. 5세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 11세에 비에냐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유수의 교향악단과 협연을 시작했다. 85년 14세의 나이로 도쿄, 뮌헨, 베를린에서 순회연주를 가졌고 이듬해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데뷔했다. 89년 세계 최고 권위의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 이래 거장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와 함께 ‘소련 3대 신동’으로 꼽혔다.

오케스트라가 투어를 하면서 가장 곤란할 때는 협연자가 펑크를 낼 때다. 대개는 질병과 출산, 친인척의 경조사를 교체 사유로 외부에 알리지만 실제로는 연습 부족이나 지휘자, 매니지먼트와의 불화로 인한 공연자 변경을 조용하게 처리하느라 무대 뒤 인력들이 고심한다. 그럴 때 나타난 대체 연주자는 오케스트라나 프로모터에겐 구세주나 다름없다.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은 세계 명문 악단들이 비상 상황에서 최우선으로 연락을 취하는 연주자다. 2009년엔 NHK 교향악단이 임신한 율리아 피셔 대신 레핀을, 2011년엔 서울시향이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 대신 레핀을 올렸다. 30~31일 서울 공연을 갖는 시드니 심포니도 당초 투어를 추진하기로 한 연주자의 변심으로 윤디(30일)와 레핀(31일)이 한국에 오게 됐다. 평소 준비해 놓은 레퍼토리가 많고 그동안 협연했던 지휘자와 악단의 반응이 좋았기에 가능한 조합이다. 첼로의 요요 마와 함께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유쾌함으로 음악 관계자들의 얼굴을 밝게 만드는 호인의 이미지가 레핀의 매력이다. 그동안 여섯 번이나 내한했지만 흔히 ‘러시아 바이올린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는 막심 벤게로프 만큼의 인지도는 아직 국내에 없다.


그는 1971년 시베리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11세에 비에냐프스키 주니어 콩쿠르를 우승하고 18세인 89년 벨기에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90년대 초 이미 세계 최정상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로 자리를 잡았다. 89년 독일로 근거지를 옮겼다가 요즘에는 모스크바와 고향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동향의 라이벌 벤게로프를 가르친 자카르 브론이 스승이다.


어릴 때부터 큰 체구에서 오는 보잉의 안정감이나 예풍이 러시아의 거장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자연스레 연상시켰다. 특히 동유럽 작곡가의 작품에서 즉흥적인 흐름을 중시하고 느린 속도로 템포에 변화를 주면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해석은 유소년의 연주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안정된 기량을 보였다.


어쩌다 실수가 보이면 리뷰에선 “레핀답지 않은 실수”란 표현이 자연스레 따라다닐 만큼 집중력과 완성도에서 여느 연주자와 다른 경지를 보였지만, 30대에 접어든 2000년대엔 잠시 슬럼프를 겪었다. 기교는 현란하지만 감동은 부족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2001년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초프스키와의 듀오 공연은 뒤늦게 잡힌 일본 공연으로 내한을 취소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레핀을 오랫동안 지켜본 관계자들은 2001년 결혼한 부인과 10여 년을 함께하는 동안 자신감 넘치는 특유의 볼륨을 잃어버렸다고 우려했다. 오랫동안 함께한 음반사인 에라토에서 도이치그라모폰으로 이적한 것도 재도약을 모색하는 차원이었다.


레핀 음악 인생의 일대 전환은 볼쇼이 발레단의 간판 발레리나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의 재혼이었다. 2011년 딸의 출산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들의 관계는 예술사에도 흔치 않은,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와 발레리나의 결합이었다. 자하로바와 결혼하면서 레핀의 음악은 이전과는 다른 환경과 마주했다. 스케줄에 여유를 두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면서 고향 노보시비르스크에서의 활동을 넓히고 있다. 2013년과 2015년, 세종 솔로이스츠와의 두 차례 내한에서 활력을 되찾은 레핀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라라 주미 강은 우승 자격 충분” 지난 6일, 영국 실내악의 성지라고 꼽히는 위그모어홀 공연을 위해 런던을 방문한 레핀과 만났다. 숙면을 취한 후 스마트폰을 들고 호텔 로비로 내려오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2~3년 전보다 체중을 줄인 듯, 건강하고 다부진 체형이 드러나는 셔츠를 입었고, 뺨에서 전해지는 스킨 향기가 강렬했다. 레핀이 한국에 관해 먼저 꺼낸 이야기는 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였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클라라 주미 강이 내가 생각했던 우승자다. 그녀가 우승을 했어야 하는 대회였다. 이런 결과가 그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바란다.”


클라라 주미 강의 어느 면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가. “경연 내내 청중을 압도하고 심사위원에게 말을 거는 연주였다. 대회에 나가서 그렇게 하는 것이 모험적이고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주재하는 페스티벌에 초청한 것도 그녀를 위로하고 러시아 관객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콩쿠르에 입상한 이후에는 어떻게 경력을 쌓는 게 이상적인가. “나 역시 콩쿠르에서 이력을 쌓으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지금도 대회 심사위원을 하는데, 분명한 것은 입상자는 다음 대회전까지 주어진 무대를 기회로 삼아 최선을 다해 실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상자가 누릴 기회가 유한하다는 점을 알고 콩쿠르에서 상을 받을 때 보다 더 발전해야 한다.”


주요 콩쿠르에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대거 입상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차이콥스키 콩쿠르도 그렇고 오랫동안 한국 교육계가 바이올린에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한 결실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 ‘바이올린의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내한공연에서 본 한국 청중의 수준은 어땠나. “서울 관객은 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춘 이들이다. 연주의 성패에 관계없이 환영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연주 도중에 관객이 고도로 집중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낀다. 특히 서울시향 반주로 정명훈과 연주할 때 그랬다.”


정명훈은 어떤 매력을 가진 지휘자인가. “지시가 명확하기 때문에 협연자와 갈등할 여지가 줄어든다. 복잡한 음악언어를 명료하고 듣기 쉽게 처리하는 게 놀랍다. 정명훈의 서울시향 리더십에 관련한 이야기들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내가 함께한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매우 훌륭했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다. 정명훈이 시간이 된다면 내가 감독하는 트랜스 시베리아 축제에 참가했으면 좋겠다.”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Svetlana-Zakharova) 1979년 우크라이나 출생. 바가노바 발레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96년 마린스키 발레단에 들어가 입단 1년만에 수석무용수가 됐다. 99년 파리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라바야데르’로 세계적인 스타로 떠올랐고, 2003년 볼쇼이발레단으로 이적했다.

“최고 발레리나인 아내와 시베리아 축제 구상” 트랜스 시베리아 축제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시베리아 횡단 철도 구간을 다니며 러시아의 문화, 예술을 함께 하자는 게 취지이다. 이제 2년째인데, 제 아내인 스베틀라나와 함께 이 페스티벌을 구상하는 게 대부분의 일상을 차지할 만큼 나에겐 중요한 이벤트이다. 노보시비르크에서 공연하고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각 구간에서 공연을 이어가는 게 기본적인 얼개다.”


한국 정부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사업에 관심을 갖는 것도 알고 있는가. “축제를 발전시키면서 알게 된 사안이다. 단순히 교통의 관점에서 유라시아를 연결할 것이 아니라 예술을 교류하는 장으로 트랜스 시베리아 축제가 활용되길 기대한다. 동양에선 일본과 교류할 예정이고 한국도 내년에 아내와 함께 공연을 간다. 서울에서 공연할 발레-클래식 프로젝트 ‘투 애즈 원’(Two As One)이 양국의 연결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투 애즈 원’ 제작은 어디까지 진행됐는가. “아직 세부 내용을 공개하긴 어렵지만 내가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리더를 맡고 스베틀라나가 곡에 맞춰 즉흥적으로 또는 기존에 설계된 안무를 이어가는 게 기본 골격이다. 중간 휴식을 두지 않고 100분 정도 진행되지 않을까 싶다. 초안을 잡으면서 느낀 건 내가 춤을 이해하는 것보다 스베틀라나가 음악을 이해하는 정도가 훨씬 높다는 점이다. 내 아내가 이렇게 훌륭한 댄서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했다.”


79년 우크라이나 루츠크에서 태어난 자하로바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데뷔해 ‘지젤’로 명성을 얻었다. 볼쇼이로 이적한 이후 ‘백조의 호수’ ‘돈 키호테’를 통해 호평받은 대표적인 클래식 발레리나다. 2005년 마린스키 발레단 투어로 ‘지젤’을 공연한 이후 11년 만의 내한이 될 전망이다.


2010년 볼쇼이 발레단의 런던 투어 당시 갑자기 공연에서 하차하면서 임신설이 퍼졌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파트너가 레핀이라고 추정한 매체는 거의 없었다. 신장이 커서 동작이 시원시원하지만 밸런스가 흔들린다는 평가도 받는다. 발레리나인 동시에 러시아 집권 여당 ‘통합 러시아’ 소속으로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푸틴 대통령의 목소리를 꾸준히 전하고 있는 정치인으로 활동 중이다. 덕분에 스베틀라나가 관련된 트랜스 시베리아 프로젝트에 러시아 정부의 지원은 가히 전폭적이다.

아내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와 함께 ‘발가락과 손가락을 위한 파드되’ 무대에 나선 바딤 레핀.

“좋은 악기는 곱게 다룰수록 멋진 소리 허락”


내한하는 시드니 심포니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지난해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을 시드니 심포니 감독 데이비드 로버트슨과 시드니에서 함께했는데 악단과의 호흡이 아주 좋았다. 로버트슨은 협연자를 아주 편안하게 만드는 지휘자다. 다감하고 사려 깊은 마에스트로라 할 수 있다. 협연자와 악단이 초면일 때는 지휘자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커뮤니케이션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로버트슨은 환상적이다. 무대 위에서나 공연장 밖에서나 한결같이 친근한 지휘자다.”


서울에서 연주할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은 유명하지만 녹음을 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는가. “CD대신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한 DVD가 있긴 하다. 현재는 도이치그라모폰과의 전속 계약이 끝난 상황이라 내가 하고 싶은 곡이 있다고 아무 곡이나 레코딩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유명한 협주곡들은 녹음했으니까 앞으로는 비인기곡을 위주로 할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청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2번에 관심을 갖고 있다.”


고가의 바이올린인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과르네리를 지속적으로 바꾸며 연주 생활을 하고 있다. 한 악기에 만족을 못하는 건가. “기본적으로 악기는 보유하지 않고 임대를 선호한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을 얼마 동안 독점하는 기쁨을 계속해서 맛보고 싶다. 스트라디바리우스나 과르네리 모두 가진 매력이 서로 다르다. 곱게 다룰수록 좋은 소리를 하나씩 허락하는 속성을 보고 있으면 인간관계의 감정 교환과도 비슷함을 느낀다. 언제나 더 좋은 악기를 찾는다.” ●


런던 글 한정호 클래식 평론가 imbreeze@naver.com, 사진 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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