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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챌린저 & 체인저] 암호학 전공 여성 1호… ‘연예인 화보 해킹’때 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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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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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디지털 콘텐트 보안시장 1위 기업인 테르텐의 이영 대표가 ‘벤처 창업 메카’인 구로디지털밸리를 배경으로 섰다. 그는 한국여성벤처협회장을 맡으며 여성 벤처인을 위한 창업 환경 조성에도 힘쓰고 있다. [신인섭 기자]

1990년대 초반, 수학을 전공하던 여대생은 외국 서적을 보다 ‘암호학’이란 학문에 눈이 꽂혔다. 암호 제작과 해독, 알고리즘 분석 등 수학적 사고(思考)에서부터 통신·해킹 같은 정보기술(IT) 분야까지 다루는 암호학은 신세계처럼 다가왔다. 93년 카이스트(KAIST) 석박사 과정에 진학한 그는 뜻맞는 교수·학생들과 한국에서 암호학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현재 국내의 보안기술 연구를 이끄는 KAIST 전자공학과 김용대 교수,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김승주 교수 등이 그와 함께했던 암호학 1세대들이다.

<26> 디지털 콘텐트 보안시장 1위, 이영 테르텐 CEO

 국내 여성 1호 암호학 전공자이자 디지털 콘텐트 보안시장 1위 기업인 테르텐의 최고경영자(CEO)인 이영(46) 대표 얘기다. 그는 한국여성벤처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 대표는 “당시 인터넷이 막 꽃피기 시작했는데 디지털 산업에 큰 변혁이 올 것으로 예상했다”며 “당시 교수님·선배·친구들과 진행한 다양한 연구가 지금의 테르텐을 있게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0년 졸업 뒤 과감히 창업의 길을 택했다. 당시 불었던 벤처 열풍도 한 몫 했지만, 자신의 성격상 연구원·대기업 생활은 맞지 않을 것 같아 테르텐을 세웠다. 테르텐은 티베트어로 ‘인류를 구원할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자신이 배운 암호학을 현실에 적용해 한국 IT 보안업계의 테르텐이 되고 싶었다. 이 대표는 “처음에는 뭐든지 성공할 것 같은 자신감이 과도하게 흘러넘쳤다”며 “그런데 막상 창업을 하니 그런 고생길이 없더라”며 웃었다.

 테르텐이 내세운 아이템은 디지털 콘텐트의 불법 복제와 무단 사용을 막는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기술이다. 예컨대 마우스 버튼이나 키보드 기능을 비활성화하는 방식으로 각종 유료 사진·동영상을 캡쳐·다운로드하는 걸 막는 것이다. 한국을 비롯해 미국·일본 중국 등에 관련 특허 20개를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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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마침 초고속 인터넷이 깔리면서 DRM 기술이 날개를 펴는 듯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암초가 있었다. 소프트웨어 공룡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같은 분야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 디지털 저작권이라는 개념도 정립되지 않아 시장 자체가 너무 작았다. 해외로 진출하려 했지만 초고속 인터넷이 전국에 깔리던 국내와 달리 해외에서는 인프라가 빈약했다.

 그는 “당시 우리가 진출할 수 있는 분야를 다시 따져 보니 인터넷 강의 동영상을 만드는 노량진·영등포 등의 학원가밖에 없더라”며 “직접 학원가를 다리품을 팔아 계약을 따왔다”고 회고했다.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2003년 연예인 누드 화보 서비스가 유행하던 때였다. 당시 연예인 한 명의 화보가 개시 2분 전에 해킹을 당해 막대한 손해를 봤다. 해당 업체는 다른 연예인 화보 서비스 개시를 앞두고 ‘데이터를 보호해달라’며 테르텐을 찾아왔다. 해킹을 막지 못하면 ‘쪽박’이었고, 반대로 막아내면 ‘대박’이 나는 도박이었다. 위험 부담은 있지만 그간 쌓아온 기술로 해킹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과는 대성공. 해당 업체의 보안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면서 테르텐은 당시 정보통신부가 지정한 ‘디지털 성공사례 1호’로 지정됐다. 이후 주요 포털 웹툰의 화면 복사 방지, 국회방송 녹화 방지, 민원 24의 전자문서 복사 방지 등 DRM 관련 분야의 국내 사업 80% 가량을 따내며 1위 업체로 우뚝 섰다.

 하지만 2006년 즈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미국 IT 전문지 레드허링이 선정한 아시아 100대 기업에 선정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매출은 정점을 찍은 뒤 좀처럼 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소프트웨어 사용 환경 탓이었다. 외국에선 소프트웨어를 팔면 주기적으로 유지보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수익을 챙긴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은 유지 보수비에 돈을 쓰지 않았다. 매번 새 기술을 개발해 매출을 내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래도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다. 묵묵히 연구개발(R&D)에 집중하며 ‘긴 호흡’으로 가는 게 맞다고 봤다.

 2008년 애플의 앱스토어가 문을 열고 스마트폰이 본격 보급되면서 돌파구가 보였다. 콘텐트 이용 패턴은 PC에서 스마트폰으로 급격히 이동했다. 클라우드 서비스와 각종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오피스 환경이 조성됐다. 스마트 기기의 보안에 대한 중요성이 새롭게 화두로 떠올랐다. 테르텐은 그간 연구개발(R&D)을 통해 개발한 보안 솔루션을 스마트 기기에 적용하면서 매출이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스티브 잡스 오라버니께서(웃음) 회사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셈”이라며 “모르는 분야에 진출하기보다는 잘 아는 분야에서 때를 기다리면 시장이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여성벤처협회장을 맡으며 여성 창업자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예전보다 나아졌다지만 국내 벤처에서 여성이 최고경영자(CEO)인 곳은 8%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 중 하위권이다. 벤처 업계에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있다는 얘기다.

 실제 그도 직접 회사를 이끌며 많은 차별·편견과 싸워왔다. 금융회사나 거래처에서 여자라고 무시 당하기도 했고, 임원 면접을 보러온 면접자는 ‘여성 CEO를 모실 자신이 없다’며 채용을 포기했다.

 그는 “남성 기업인은 남성 위주로 짜인 한국 사회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이용하지만, 여성 기업인은 여기에 진입하는 데 제약이 많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한국의 거의 유일한 자원이 사람인데, 이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그간 자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렇다고 창업을 꿈꾸는 여성들에게 이를 포기하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는 “중요한 인사와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남성보다 쉽게 주목받을 수 있는 등 유리한 점도 있다”며 “여성들은 더 혹독한 능력 검증을 거쳐 남성 중심의 문화에 편입해야 하는데, 근성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현재 테르텐은 모바일 디바이스 화면 보호와 블랙박스·CCTV 등 멀티미디어 영상의 위변조를 막는 시스템을 등에 업고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일본 시장에선 주요 기업과 계약을 체결하고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올해 안에 중국·동남아 시장에도 진출한다. 갈수록 지능화하는 사이버 공격에 맞서 회사를 디지털 보안 플랫폼 업체로 키우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그는 인터뷰 말미 후배 벤처인들을 위한 조언을 해달라는 질문에 “‘너는 왜 기업을 하느냐’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이 대표는 “기업의 큰 성공은 운에 달렸고, 기업의 실패는 실력에 달렸다”며 “운은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이 때까지 버틸 실력을 갖추려면 먼저 자신의 기업관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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