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펀 레거시 흔들린다

중앙일보

입력

‘돈의 해악(Money Mischief)’.
미국의 통화이론가인 고(故) 밀튼 프리드먼이 인플레이션에 붙인 닉네임이다. 그는 “인플레이션은 언제나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Monetary Phenomenon)”이라고 강조했다. 임금 상승 등이 아니라 통화량 증가가 인플레이션 원인이란 얘기다. 이를 얼마나 철석같이 믿었으면 1992년에 통화의 역사를 주제로 펴낸 책의 제목을 『Money Mischief』라고 붙였을까. 국내에선 『화폐경제학』이란 제목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프리드먼은 2006년 숨을 거뒀다. 그리고 2년 뒤 미국 월가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양적 완화(QE)란 이름의 돈 찍어내기(머니 프린팅)가 미국·영국·일본·유로존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뤄졌다. 스위스계 투자은행 크레디트스위스는는 최근 보고서에서 “서방 중앙은행이 QE란 이름으로 찍어낸 돈이 8조 달러(약 9200조원)에 이른다”며 “주요 중앙은행이 거의 동시에 이렇게 많은 통화를 공격적으로 푼 적은 역사적으로 거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돈의 해악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 프리드먼은 『화폐경제학』에서 “통화량이 급증하면 처음엔 금리가 내려간다. 얼마 뒤 소비가 늘어 물가가 오르면서 금리가 상승한다”고 주장했다. QE를 시작한 지 8년 정도 흘렀다. 프리드먼이 말한 “얼마 뒤”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그런데도 물가는 오르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올 10월 셋째 주는 주요국 물가 상승률이 발표돼 ‘물가지수의 주간’으로 불린다”며 “주요국 중앙은행의 9월 물가 성적표는 좋지 않았다”고 15일 전했다. 경제 성장률이 높은 중국의 물가마저도 1.6%(전년 동기 대비) 오르는 데 그쳤다. 미국·일본·영국·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 국)의 9월 물가 상승률은 -0.5~0.5% 수준이었다.

반면 이들 나라의 물가안정목표(인플레이션 타깃)은 연 2%다. 중국은 연 3.5%다. Fed 이사를 역임한 프레드릭 미쉬킨 컬럼비아대학 교수는“물가가 안정목표보다 낮으면 중앙은행 정책이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며 “인플레 타깃은 ‘물가를 그 수준 이상으로 오르지 않겠다’는 약속이면서 동시에 ‘그 수준까지는 오르도록 하겠다’는 중앙은행의 의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요즘 물가를 보면 중앙은행 뜻대로 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경제학) 교수 등은 여전히 인플레이션을 우려한다. 그들은 “조만간 물가가 비상한다”고 경고하며 “미리 기준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하지만 물가에 민감한 채권시장의 기대인플레이션(BEI)을 보면 선제적 금리인상이 필요할지 의문이다.

BEI(Breakeven Inflation Rate)는 물가연동국채 금리에서 만기가 같은 일반 국채의 금리를 뺀 차이다. 14일(현지시간) 미국 10년 만기 국채 BEI는 1.5% 정도였다. 이는 10년 만기 물가연동국채 금리에서 10년 만기 일반 국채 금리를 뺀 값이다. 현재 채권 트레이어더들이 10년 뒤 인플레이션 수준이 1.5%이 될 것으로 보고 돈을 베팅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날 5년 만기 BEI도 1.14%에 불과했다. 채권시장 참여자들이 예상한 5년 뒤 물가상승률이 이 정도란 의미다. 1년 뒤 물가전망(1년만기 BEI)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날 현재 -1.79%였다.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다가오고 있다는 예측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요즘 채권시장 동향에 비춰 QE로 돈이 많이 풀려 있어 조만간 물가가 가파르게 오를 것이라고 경고하는 전문가들이 양치기 소년이 됐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중앙은행-채권 트레이더들의 협력관계가 균열을 보이고 있다. 미쉬킨 교수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시사하면 채권 트레이더들은 채권 값을 떨어뜨려 시장 금리가 오르는 게 일반적이었다”며 “이런 관계는 중앙은행 정책이 금융시장뿐 아니라 실물 경제를 움직이는 데 필수 요소”라고 설명했다. 금리와 채권 값은 역의 관계여서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값은 떨어진다.

BEI 움직임을 보면 요즘 채권 트레이어들은 기준금리 인상을 시사한 Fed의 의도와는 반대로 베팅하고 있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현재 보유한 채권을 빨리 팔아야 한다. 하지만 트레이더들은 채권을 팔지 않고 사들이고 있다. 시장 금리가 떨어지는 까닭이다. 블룸버그는 “채권시장 플레이어들이 Fed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했다. Fed만 불신받는 게 아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영란은행(BOE), 일본은행(BOJ) 등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믿지 못한단 말인가.
메이저 자산운용사인 스테이트스트리트의 투자전략가인 리 페리지는 최근 블룸버그와 인터뷰에서 “주요 중앙은행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풀었다. 그렇지만 디플레이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앙은행이 물가와 더 나아가 실물경제를 조절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물 경제 조절능력이란 중앙은행이 금리 조절 등을 통해 물가와 국내총생산(GDP), 실업률 등을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치몬드 연방준비은행 수석 이코노미트스인 로버트 헤첼은 『Fed의 통화정책(The Monetary Policy of the Federal Reserve)』에서 “실물 경제 조절 능력은 Fed의 사실상 존재이유”라며 “이 능력이 의심받으면 채권 트레이더나 펀드매니저 등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들은 Fed의 뜻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Fed가 금리를 올리거나 내려도 금융시장이 원하는 방향으로 원하는 만큼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다. Fed의 조절능력을 더욱 떨어뜨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헤첼은 “Fed의 조절능력은 앨런 그린스펀 전 의장(1987~2006년)의 레거시(유산)”라고 했다. Fed 가 1913년 설립 이후 늘 조절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란 뉘앙스였다. 미쉬킨 교수는 “1930년대 대공황 때나 70년대 후반 스태그플레이션(고물가+저성장) 시기에 Fed는 물가나 성장률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Fed 비판가들은 한 술 더 떠 “그린스펀 시대가 예외적인 기간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린스펀의 정책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새로운 통화정책 표준(New Monetary Standard)’으로 통했다. 인플레이션을 적절하게 억제하면서도 실물경제 활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해서다. 물론 그도 실패한 통화정책이 있다. 2001년 위기 순간 푼 돈이 자산거품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헤첼은 “그린스펀의 ‘새로운 통화정책 표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가 바로 ‘Fed-채권 트레이더의 협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린스펀이 정책 방향을 시사하면 채권시장이 그 방향으로 신속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여줬다. 그린스펀도 채권시장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습적인 기준금리 인상이나 물가안정 흐름을 깰만한 일을 최대한 자제했다.

미국 금융저술가인 마틴 메이어는 『Fed: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금융기구가 시장을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내부 이야기(The Fed: The Inside Story of How the World's Most Powerful Financial Institution Drives the Markets)』에서 “그린스펀은 독일 동화의 ‘피리 부는 사나이’주인공 같았다”고 묘사했다. 피리를 불어 아이들(시장)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서다.

묘한 우연의 일치였지만 그린스펀이 Fed 의장에서 물러나고 통화이론가인 프리드먼이 숨진 2006년 이후 9년이 흘렀다. Fed-채권시장 플레이어 사이가 소원해지고 있다. 엄청난 통화팽창에도 돈의 해악(인플레이션)은 출현할 기미가 없어서다. Fed의 재닛 옐런 현 의장은 물론이고 영란은행의 마크 카니 총재, 유럽중앙은행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의 말도 그런시펀 때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린스펀 유산이 사라질 조짐이다. 새로운 ‘통화정책 표준’은 아직 나타나고 있지 않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 과도기에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은 불안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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