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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일본인 재력가 '200억 대 지하금괴' 사기극

중앙일보

입력

지난해 10월 22일 정오 무렵 서울 영등포구청 인근 커피숍 앞.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재력가 H씨가 은밀히 만났다. H 씨 손에는 20억 원의 수표 뭉치가 들려 있었다. 이 자금은 국내에서 음성적으로 유통되는 '200억대 지하금괴'(골드바)를 매입할 돈이었다. H 씨로부터 수표를 건네 받은 남성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2시간 뒤 이 남성은 “금괴 주인에게 수표를 확인시켰다”며 “내일 금괴를 배달받기로 하고 3억 원짜리 수표 3장을 선지급금 명목으로 금괴 주인에게 줬다”고 했다. 나머지 11억 원은 금괴를 받은 뒤 지급하기로 했다. H 씨는 시세 10분의 1에 200억 원대 금괴를 살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다. 실물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금괴 주인이 모기업체 회장 직함을 갖고 있다는 이 씨의 말에 속았다. 하지만 약속 시한이 지나도 금괴를 받지 못했고 선수금 9억 원 역시 돌려받지 못했다. H 씨는 지하금괴를 매입하려던 사실을 털어놓으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지난 5월 H 씨의 수표를 받아간 이모(71)씨를 구속했다. 이 씨는 “‘김 회장’의 부탁으로 금괴를 매입할 사람을 알아봐주고 돈 심부름을 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씨가 가지고 있던 ‘김 회장’ 명함에 적힌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명함에 나온 주소대로 ‘김 회장’ 업체를 찾아가보니 곧 허물어질 듯한 건물이었다고 한다.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 형사8부(부장 이완식)는 4 개월간의 추적 끝에 지난 달 지하금괴 주인을 사칭한 주범 ‘김 회장’(67)을 대구에서 체포했다. 중간 브로커의 통화내역을 분석한 끝에 김 씨로부터 사기를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를 찾으면서다.

검찰 조사 결과 '지하금괴'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김 씨는 공범 이 씨에게조차 가명을 사용하며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김 씨가 사기로 번 돈을 은닉해 준 혐의(범죄수익은닉)로 김 씨의 친동생과 내연녀까지 이달 초 추가 구속했다. 범죄수익은닉 혐의만으로 친형제를 구속한 건 이례적이라고 한다. 이어 김 씨 친동생의 친구 등 3~4명이 서울과 대구 등에서 수표를 현금화해 준 사실도 확인하고 소환 조사를 벌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악질 사기범이 형을 살고 나와 범죄수익으로 호화 생활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기금의 은닉처를 찾기 위한 추가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은 일본인 H 씨가 한국에서 200억 원대 지하금괴를 매입하려 한 경위도 의심하고 있다. 아직까지 사기 피해자 신분인 H 씨의 범죄 혐의점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추가 수사 과정에서 과거 일본으로 금괴를 밀수한 이력 등의 범죄 단서가 나오면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서복현 기자 sphjtb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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