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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장 종말 시대 대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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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준현
김준현 기자 중앙일보 팀장 겸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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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경제부문 기자

동네 속옷가게에 ‘폐업정리, 폭탄세일’ 현수막이 걸렸다. 싸게 속옷을 마련해볼 요량으로 아내와 들렀다가 주인장의 하소연에 발이 묶였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귀 기울여줄 사람이 필요한 듯했다. 그가 속옷가게를 낸 것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큰돈은 벌진 못해도 자식 키우며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상황이 눈에 띄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매출이 조금씩 줄더니 최근 몇 년 새 유지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임대료라도 떨어지면 그나마 버틸 텐데 오히려 임대료는 더 올랐다. 2년간 임대료를 놓고 건물주와 실랑이를 벌였지만 “남들 올리는 만큼 올려야겠다”는 고집에 폐업을 결심했다. 빌딩 상가가 활성화되는 데 속옷가게가 공로를 세운 걸 인정받지 못하고, 물가상승률의 몇 배씩 임대료를 올려주고도 폐업을 강요받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는 논외다. 확실한 건 그가 좌절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에 나이·계층을 막론하고 이런 이들이 급속히 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월급쟁이의 삶을 노예로 비하하고 우리 사회를 지옥에 비유한 ‘헬조선’, 금수저에 대비한 ‘흙수저’ 등의 표현이 유행어가 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절반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다섯에 한 명꼴로 비정규직이며, 자영업 생존율이 16%에 불과한 세상이 건전할 리 없다. 분열과 파괴의 단초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매년 6%, 7%씩 경제가 성장하면 이런 문제는 해결될까. 가능 여부를 떠나 그렇게 성장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문제가 상대적 빈곤, 상대적 박탈감인 까닭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는데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특히 양극화로 성장의 과실이 일부에게 쏠리는 지금과 같은 구조에선 성장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가 복지 강화를 국정 모토로 내세운 건 옳다. 복지를 통한 부의 재분배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분수에 맞지 않는 복지는 파국이다. 그렇다면 저성장 기조하에선 복지 등 사회적 안전망은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무턱대고 복지 재정을 늘릴 순 없지만 성장이 안 된다고 관련 예산부터 줄이는 것도 위험하다. 성장 못지않게 사회 안정과 통합도 중요한 까닭이다. 이미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됐는데도 사회적 안전망을 잘 갖춘 나라도 꽤 있다. 불가피하게 증세밖에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증세로 인한 불만을 최소화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언젠가 사회적 약자가 되었을 때 내가 낸 세금의 혜택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하며, 정부는 그에 대한 확신을 줘야 한다.

  당신은 세금을 더 내겠냐고? 나는 노년기의 질병이 두렵다. 그런 까닭에 정부가 금전적 부담을 덜어줄 것이란 확신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다.

김준현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