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공대·경영대 … 모든 학과에 문 열고 바이오의료 연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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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호 14면

1891년 개교한 미국 스탠퍼드대는 정보기술(IT) 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는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바로 옆에 캠퍼스가 있다. 구글·야후·휼렛패커드 등 수많은 IT 기업은 스탠퍼드대를 나온 인재들의 벤처정신으로 탄생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스탠퍼드대는 의대와 부속병원도 운영하고 있다. 1959년 문을 연 병원은 미국에서 선도적인 의료기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산업과 의료의 파이어니어 역할을 해온 스탠퍼드대는 9년 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산업과 의료를 융합시켜 교육·연구·사업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모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스탠퍼드대는 실리콘밸리의 바이오의료 업체들과 협력해 ‘스탠퍼드 SPARK 프로그램’(이하 스파크)을 시작했고, 지금은 전 세계 바이오의료 연구의 선두주자로 꼽히고 있다. 스파크는 단어 그대로 ‘불붙이다’는 의미로 교육·연구·사업을 활성화한다는 목표를 담았다. 최근 한국을 찾은 케빈 그라임스(58·사진) 스파크 디렉터와 만나 융복합 연구의 필요성을 들어봤다.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내과)이기도 한 그는 “학문과 산업이 제한 없이 뭉치고 서로 다른 학문들이 모여 새로운 연구를 창조하는 게 앞으로의 미래”라고 강조했다.


-스파크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실리콘밸리라는 지리적 이점과 스탠퍼드대의 강점인 바이오의료 연구를 함께 활용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스파크를 시작할 당시 바이오의료에 대한 인식이 약했다. 같이하겠다는 회사를 주변에서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학 연구진이 벤처 회사 형태로 일단 ‘창업’을 했다. 하지만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대학 실험실을 상업적인 성격으로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업과의 융합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바이오의료 업체들과 꾸준한 대화로 간극을 줄여나갔다. 의대 외에 다른 학과에도 문을 열었다.”


-스파크는 평소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나. “스파크에 소속된 학부생과 대학원생·연구원들은 새로운 치료법과 질병 진단법 등을 배운다. 동시에 바이오 의료 연구에도 투입된다. 의대가 주축이지만 공대·경영대 등 어느 학과라도 참여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스파크와 협력하는 기업들이 주로 신약·의료기기 등을 개발한다. 여러 분야가 모여 바이오의료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협동하기에 ‘의료’라는 틀에 갇혀 있지 않는다. 1년에 진행되는 연구 프로젝트는 20개 정도다. 스파크 내부에 연구위원회가 있어 200여 개의 후보군을 꼼꼼히 심사한 뒤 유망한 분야만 골라낸다.”


-교육·연구·사업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걸로 보인다. “전폭적으로 연구를 돕는 대신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프로젝트마다 연간 평균 5만 달러(약 5900만원)를 지원한다. 이는 2~3년 정도 유효하다. 하지만 연구진이 추가로 지원받으려면 일정 수준의 결과를 도출해 내야 한다. 성과가 없으면 지원이 끊기고, 성과가 있으면 다음 단계 목표까지 지원 기간을 연장해주는 식이다. 하지만 연구나 사업에만 올인하지는 않는다. 매주 수요일마다 교육을 위한 수업이 의무적으로 배정돼 있다. 멘토링도 활성화돼 연구실마다 회사 전문가나 의대 교수들과 상담할 수 있다.”


-스탠퍼드대 정도면 독자적으로 연구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기업과 손을 잡은 이유는. “미국 정부는 연간 300억 달러(약 35조원)를 의료 연구비로 대학에 지원해주고 있다. 그리고 제약사들은 해마다 연구개발에만 600억 달러(약 71조원)를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1년에 허가받는 신약은 20여 개에 불과하다. 별개로 움직이는 대학과 기업이 벽을 깨고 손을 잡아야 시너지 효과가 나고, 연구 성과도 빠르게 실용화될 수 있다. 스파크에서만 64개의 연구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종료됐다. 벤처 회사에 21건, 제약회사에 7건의 특허를 각각 사용할 수 있도록 넘겨줬다. 단지 돈이 되는 분야만 연구하는 게 아니라 공공 보건에 기여하는 백신 등도 개발하기 때문에 환자를 위한다는 자부심이 있다.”


-한국 대학병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환자를 유치하고 시설을 늘리는 데 집중하지만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측면이 있다.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나. “대학병원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인 동시에 교육·연구기관이기도 하다. 일반 병·의원과 다른 점이다. 또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는 것이 의대 교수들의 주된 임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병원들이 돈을 벌기 위해 환자를 놓고 경쟁하는 순간 연구는 멀어진다고 본다. 미국에선 융·복합 연구가 시동을 걸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한 상황과 연결된다. 외형적으로 커지더라도 연구에서 뒤지면 그 병원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임상과 교육·연구의 균형을 맞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


-대학병원에서 임상과 교육·연구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수 있을까. “미국에서는 대학병원이 돈을 벌어 의대 연구를 지원하지 않는다. 스탠퍼드대는 의대에서 기초 연구를 진행하고 임상 연구는 병원에서만 맡는 등 분업이 확실하다. 연방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보건원(NIH)이 연구비의 95% 정도를 지원해주기 때문이다. 나머지 5%만 대학의 자체 예산이나 기업·재단 후원으로 충당된다. 한국도 정부에서 연구를 지원해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 연구중심병원을 따로 지정했다고 들었는데 좋은 생각이라고 본다.”


-의료 연구에서 병원보다는 국가의 역할이 더 크다는 건가. “병원도 달라져야 하지만 국가의 지원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먼저 생물학·화학 같은 기초 연구를 생각해보자.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연구 도중 페니실린을 발명했지만 독감을 치료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기초 연구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처럼 예상치 못한 업적이 나오기도 한다. 임상 연구도 마찬가지다. 환자들의 생사와 직접 연결되는 분야인 만큼 꾸준히 챙겨야 한다. 둘 다 소홀히 하지 않으려면 정부가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 환자 치료가 현재 세대를 위한 것이라면, 연구는 다음 세대를 위한 작업이다. 15년 뒤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앞으로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큰 분야는. “지난해 에볼라가 서아프리카에서 창궐하면서 미국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 전 세계를 위협하는 대규모 감염병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 바이러스 등을 선제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또한 고령화 사회에 따른 알츠하이머성 치매도 이슈가 될 거라고 본다. 치매 노인들이 증가하면 사회 전체적인 재정 부담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치료제 개발이 필수적이다.”


-한국 병원들에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기업과 협력한다는 것이 단순히 이익 추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대학의 실험실에서 분석한 환자 데이터와 연구 결과가 보편화되기는 매우 어렵고, 그대로 묻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의료 연구라는 것도 결국은 실용화되고 시장에 나와야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이 산업과 손을 잡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공익적 기능’이 융·복합 연구의 가장 큰 목적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융·복합 연구는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앞으로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본다.”


케빈 그라임스 스탠퍼드대 의대 내과 부교수와 스파크 프로그램 디렉터를 겸직하고 있다. 2008년부터 스파크 내 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의학 박사가 된 뒤 ‘보건 경제학’을 공부해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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