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금요일] 인도의 대표 수출품 ‘최고경영자’ 그들에겐 주가드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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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8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는 특이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인도의 주요 수출품: 최고경영자들(CEOs)’.

다국적 기업 ‘인도계 CEO’ 전성시대

구글·MS·노키아 등 IT업계 많아
실리콘밸리 창업 15%는 인도인

열악한 환경의 인도에서 경험 쌓아
돌발 상황 대처하는 능력 탁월

유창한 영어, 높은 교육 수준 갖춰
다문화·다종교·다언어 사회서 자라
소통능력·포용력 뛰어난 것도 장점

 전 세계 다국적 기업의 수장 자리를 속속 꿰차는 인도 출신 CEO를 조명하는 특집 기사였다. 당시 인도 출신 다국적 기업의 CEO는 아자이 방가(마스터카드), 인드라 누이(펩시), 비크람 판디트(씨티그룹) 등이었다. 4년 넘는 시간이 흐른 요즘에는 인도 출신 CEO 명단이 더 길어졌다. 인도 최고 수출품의 양이 더 늘고 있다는 얘기다. 일부에서는 ‘메이드 인 인디아(Made in India) CEO’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는 말도 나온다.

 가장 눈에 띄는 분야는 정보기술(IT) 기업이다. 지난달 구글은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밝히며 새로운 CEO를 임명했다. 브라우저 ‘크롬’ 개발을 진두지휘하며 구글 내에서 ‘해결사’로 통하는 순다르 피차이(43) 선임 부사장이 ‘구글호’를 이끌 선장에 발탁됐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MS)가 스티브 발머의 후임으로 사티아 나델라(48) 수석 부사장을 CEO로 낙점했다. 핀란드의 대표 기업이었다가 MS에 인수된 노키아의 수장도 인도 출신의 라지브 수리(47)다.

 미국 경제매체 쿼츠는 “인도 출신 CEO가 이끄는 구글과 MS, 노키아 세 기업의 지난해 매출 총합(1596억 달러)은 전 세계 140개국의 국내총생산(GDP)보다 많고, 헝가리의 GDP(1370억 달러)에 버금간다”고 보도했다. 산타누 나라옌(52) 어도비시스템스 CEO, 산자이 쿠마르(52) 글로벌 파운드리스 CEO 등도 인도 출신이다.

 인도계 CEO를 영입한 기업은 IT업계만이 아니다. 세계 굴지의 기업에 인도 출신 CEO가 포진하고 있다. 세계 2위 식음료 업체로 11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펩시의 CEO 인드라 누이(60)는 2006년 펩시 최초의 여성 CEO로 임명된 뒤 장기 집권 중이다. 누이는 처음 임명될 때 인도에서 불거진 ‘농약 콜라’ 파문을 수습하기 위해 발탁됐다는 뒷말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회사 최고 재무담당자로 식품회사 인수합병(M&A)을 진두지휘했던 역량을 발휘하며 거함 펩시를 순조롭게 이끌고 있다. 누이는 포춘이 선정한 ‘2015년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2위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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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종합생활용품 업체 레킷벤키저의 라케시 카푸어(57) CEO와 조니워커와 기네스 등을 생산하는 영국의 주류 회사 디아지오의 이반 메네제스(56) CEO도 인도 출신이다. 이반 메네제스의 형은 씨티그룹 수석 부회장을 역임한 빅터 메네제스(66)다. 아자이 방가(55) 마스터카드 CEO의 형은 유니레버 사장을 지낸 빈디 방가(61)다. 레디프 비즈니스는 “S&P500 기업 CEO의 국적을 따져보면 인도 출신이 미국인 다음으로 많다”며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기업의 15%가량은 인도 사람이 세운 회사일 정도”라고 보도했다.

 다국적 기업을 사로잡은 인도인 CEO의 매력은 무엇일까.

 먼저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과 높은 교육 수준, 명석한 두뇌를 꼽을 수 있다. 인도에서 영어는 상용어다. 인도인은 영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데 능하다. 해외 진출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인 언어 장벽이 없는 셈이다. 물론 말만 된다고 세계 무대에서 다 통하는 건 아니다. 과학과 공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구글이나 MS 등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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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학적 전문성에 더해 경영 마인드를 갖춘 것도 CEO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CNN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 최고의 공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경영대학원을 마친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인도 출신 CEO의 행보를 보여주는 거울 같다”고 보도했다.

인도 남부 첸나이에서 태어난 피차이는 부품 공장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속기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 인도 최고의 공대인 인도공과대(IIT)를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취득했다. 나델라 MS CEO도 비슷한 길을 밟았다. 인도의 마니팔공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시카고 부스 비즈니스스쿨에서 MBA를 땄다.

 인도 출신 엘리트의 맨파워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미국 내 다른 나라 국적 소지자의 교육 수준과 소득수준을 분석한 결과 인도인의 42%가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소지했다. 평균 가계소득도 연간 10만 달러(약 1억1920만원)로 일반 미국 백인 가정의 배 정도였다.

 무엇보다 인도계 CEO에게서 두드러진 자질은 그들의 DNA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주가드(jugaad)’다. ‘즉흥적 창의력’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주가드는 예기치 못한 위기상황에 신속하게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타임지는 “인도의 열악한 기업 환경과 미흡한 인프라,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인도에서 일하려면 잇따라 발생하는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플랜B와 플랜C 등 다양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이는 인도의 열악한 상황이 엘리트를 키우는 숙주가 됐다는 의미다. 인도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최악의 상황을 접하다 보니 어려운 상태에서도 해결책을 찾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마스터카드 CEO인 아자이 방가가 1980년대 초 인도 네슬레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섭씨 38도가 넘는 기온에 냉장 설비와 전력 공급망을 갖추지 못한 지역에서 킷캣(Kit Kats) 초콜릿을 팔기 위해 방가는 자체적으로 냉장 카트, 수송차량, 창고 등을 만들어 초콜릿의 품질을 유지했다. 이 일은 인도인 특유의 주가드가 발휘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다문화·다종교·다언어 사회에서 자라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의사소통하는 데 익숙하고, 타인과 타 문화에 대한 포용력이 높은 것도 인도 출신 CEO의 장점으로 꼽힌다. 나델라 MS CEO가 지난해 취임 3개월 만에 회사 행사에서 애플 제품을 쓰지 않는 금기를 깨뜨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라이벌 회사의 제품을 적으로 여기는 대신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했다.

 이는 “인도 출신 경영자는 조직원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감정적인 연대를 중시한다”는 스위스 상트갈렌대의 조사와도 맥을 같이한다. 조사 결과를 뒷받침하듯 인디라 누이 펩시 CEO는 “직원 개개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에게 회사 밖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4567명의 직원 중 하나가 아닌 온전한 삶의 주체로서 개개인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고 늘 강조한다.

 한 조직에 오랫동안 몸담으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간 것도 인도 출신 CEO의 덕목이다. 라지브 라오 칼럼니스트는 지디넷에 기고한 글에서 “인도계 IT기업 CEO의 대부분은 각 기업의 제품 총괄을 맡았거나 제품 사업부의 수장으로서 조직 서열을 높여갔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는 “인도 출신 CEO는 자신의 분야에서 인내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조직을 볼 수 있도록 준비하면서 꿈을 이루기 위한 인내심을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누이 펩시 CEO는 94년에 입사했고, 이반 메네제스 디아지오 CEO도 97년 회사에 첫발을 들였다. 나델라도 MS의 수장이 될 때까지 22년의 세월을 보냈다.

 인도 출신 CEO의 한계를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인도계 CEO가 창업자보다는 전문경영인 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만큼 혁신가의 면모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인도계 CEO’의 매력이 한계를 앞설 듯하다. ‘인디아 CEO’의 전성기는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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