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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가족 사망 사건’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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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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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논설위원

 50대 새아빠가 40대 엄마와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을 살해한 뒤 목숨을 끊었다. 며칠 전 발생한 일명 ‘제주 어린이집 일가족 사망 사건’이다. 새아빠가 이 의붓딸에 대한 성추행 혐의로 다음달 첫 공판을 앞두고 있었다는 게 알려져 충격이 더 컸다. 재혼한 다음해인 2013년, 당시 9세인 딸을 10여 차례 성추행한 혐의다.

 인터넷에는 “이러니 재혼할 때, 특히 딸 가진 엄마들은 조심해야 한다”는 반응이 많다. 그러나 친부·친딸 사이라고 무조건 성폭행 안전지대는 아니니 재혼가정에 더 많이 노출된 위험이라는 인식은 온당치 못하다.

 당사자들이 모두 숨졌기 때문에 진실은 땅에 묻히게 됐다. 성추행 사건도 그렇고, ‘일가족 사망 사건’ 수사도 유력한 피의자가 사망해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크다(새아빠가 아닌 제3자의 범행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말이다). 성추행이 사실이라면 지난 2년간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집에서 지내 왔고, 어린 딸에 대한 성추행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았단 얘기다.

 ‘제주 어린이집 일가족 사망 사건’. 그러나 이 일가족 사망 사건은 가족여행 중 차량 전복으로 일어난 안타까운 ‘일가족 사망 사건’과 다르다. 본질은 ‘일가족 사망’이 아니라 남편에 의한 ‘일가족 살인’이다.

 지난 5월, 8세 어린이가 포함된 부산 일가족 사망 사건(동반자살) 때 한국아동단체협의회와 중앙자살예방센터는 ‘일가족 동반자살’이 아닌 ‘살해 후 자살’로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당시 30대 송모씨는 수면제를 먹은 나머지 가족을 목 졸라 죽인 후 투신했다). 특히 “다른 가족은 몰라도 8세 어린이가 자신의 죽음에 동의했을지 생각해 볼 문제”라며 “어른들의 판단으로 어린이 목숨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살해는 엄연한 범죄”라고 강조했다.

 안타깝게도 인터넷에는 제주·부산·거제 등 지명만 달리하는 ‘일가족 사망’ 사건들이 즐비하다. 명백한 가족 살인을 ‘일가족 사망’이라며 두루뭉술하게 넘긴 경우도 적잖다. 어린 자녀를 대동하는 동반자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 사건의 비극성에 주목할 뿐 자녀의 선택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차라리 고아가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둘 다 우리 사회 ‘가족주의’와 맞닿은 문제다. 가족 내 폭력을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는 범죄라기보다 사적 영역인 가족 구성원끼리의 문제로 묶어 두려 하거나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쯤으로 여기는 낡은 ‘가족주의’의 유산이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