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 어머니는 신뢰를 가르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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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기업의 혁신이 사상의 ‘자유’에서 나왔다면 한국 기업의 혁신은 ‘사랑’에서 나왔다. 조국에 대한 사랑, 배고픈 국민에 대한 사랑, 내 어머니에 대한 사랑….

아모레, 고 서성환 회장 평전 출간
품질의 중요성 어려서부터 체득
70년 역사의 1등 화장품사 일궈

 국내 1위 화장품 기업인 아모레퍼시픽(옛 태평양)도 그렇다. 서성환(1924~2003) 선대회장이 1945년에 세운 광복둥이 기업은 이제 중국을 넘어 세계 속의 ‘K-뷰티(beauty)’열풍을 이끄는 주역이 됐다. 회사가 올해 광복·창립 70주년을 맞이해 펴낸 서성환 선대회장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사진)는 그의 절절한 일기다. 16살 짜리 소년이 고된 환경의 조국에서 꿈을 잃지 않기 위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 온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1930년대. 소년 서성환은 개성에서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던 어머니(윤독정 여사)를 도우며 품질과 신용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긴 개성상인의 정신을 뼛속깊이 체득했다. 서 회장 역시 ‘신뢰’를 핵심 가치로 삼고 기업을 키웠다.

 그에게 고객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회사와 함께 가는 사람 모두였다. ‘고객(국민)이 살아야 기업이 산다’는 생각이었다. 회사가 성장궤도에 들어서자 어머니의 힘을 기억하며 전쟁 미망인 등 여성들을 모아 방문 판매원을 운영했다. 무엇보다 품질 최우선주의를 고집하며 연구개발(R&D)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세계적 명성의 한방 화장품 ‘설화수’(1997년)가 나오기까지 40년 연구가 진행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원들은 “사장님이 가장 행복해 보일 때는 연구실이 커질 때”라고 회고했다.

 외환위기라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서 회장의 결단으로 지어진 태평양종합연구소의 준공식 분위기는 숙연하기까지 했다. 평전엔 서 회장이 ‘화장품 산업을 선택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그런 그가 화장품 외에 꼭 하나 애정을 쏟은 것이 바로 녹차다. 쇠퇴해가는 차 문화를 안타깝게 여겨 사재를 털어 제주와 호남에 차 재배단지를 일구고 설록차를 생산해 낸 것이다. 제주의 ‘오설록 티뮤지엄’은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아들인 서경배(52)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조선인으로 태어난 젊은이들이 피땀 흘려 대한민국의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 한 사람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역할을 해내 이 나라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이 평전이 쓰여진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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