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일본군 악몽 꿔” “꼭 사죄 받아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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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위안부 피해자 줘톈메이 할머니(오른쪽)와 한국인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가 17일 밤 상하이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굳이 아픈 과거를 말하려 들지 않았다. 대신 서로 건강을 묻고 걱정하며 “일본의 사죄를 받을 때까지 오래 살자”고 다짐했다. [상하이=예영준 특파원]

한국인 강일출(88) 할머니와 중국인 줘톈메이(卓天妹·91) 할머니. 두 사람은 서로의 거울이다. 자서전을 쓰면 시간·장소만 바꾸면 될 정도다. 꽃다운 소녀 시절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평생을 아픔 속에 살아온 역정, 나이 아흔 안팎인 지금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고통,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내기 전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각오 등이 모두 닮은 꼴이다. 두 사람은 18일 중국 상하이 사범대학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 강연회에 함께 참석했다.

한·중 위안부 피해 할머니 첫 만남
상하이 사범대 강연회서 손 잡아
줘할머니 “TV서 일본군 봐도 떨어”
나눔의 집서 기거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인 피해자, 관심·지원 못 받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하루 하루가 사람의 삶이 아니었어요.” 줘 할머니는 눈물을 훔쳐가며 증언했다. 중국 최남단 하이난다오(海南島)의 소수 민족 리(黎)족 마을에 살던 그가 인근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 간 건 14세 때였다. 일본군은 어린 그에게 처음엔 심부름을 시켰다. 우물에서 물 길어주고, 빨래와 설거지, 마당 청소 등이 그의 업무였다. 어느 날 밤 술 취한 일본군 몇 사람이 그를 부엌의 땔감 더미로 몰아넣고 집단 성폭행했다.

 “온몸이 떨리고 땀에 젖었다. 울고 싶어도 울음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 뒤론 매일 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때리거나 벌을 주었다. 이런 일이 4년 동안 계속됐다. 패망한 일본군이 물러났을 때 함께 끌려간 7명의 어린 소녀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니 부모는 모두 세상을 떠나고 형제는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다행히 마을 청년과 결혼해 1남4녀를 둔 게 모진 세월을 견디게 한 버팀목이었다.

 몇 차례 증언을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강 할머니의 삶도 줘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경북 상주 곶감 농사 부잣집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강 할머니의 삶도 16세 때 망가졌다. 중국 지린(吉林)성의 위안소로 끌려간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군인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게 더 좋았다”고 회상할 만큼 갖은 고초를 겪었다. 중국 땅에 남아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강 할머니를 기다린 건 휑하니 빈집이었다. 줘 할머니의 귀향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 형제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줘 할머니는 요즘도 악몽을 꾼다고 며느리 천위충(陳玉瓊)이 말했다. “일본군에 쫓겨 도망가다 결국 붙잡히고 마는 꿈을 꾸는 순간, 가위눌려 깨곤 하세요. 한번은 가족 모두 TV를 보는데 일본군이 나오자 갑자기 벌벌 떨더니 자기 방으로 쫓기듯 뛰어가시는 거에요. 따라 가보니 완전히 넋을 잃고 계시더군요.”

 두 할머니는 1박2일 동안 같은 숙소에 묵고 식사를 함께하며 서로의 아픔을 위로했다. 한국과 중국의 위안부 할머니가 만나 짧은 동안이나마 함께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다. 양측 자원봉사자들의 주선으로 이뤄진 만남이었다. “할머니 이것 좀 잡숴봐요,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지, 그래야 일본의 사죄도 받아낼 것 아니에요.” 줘 할머니에게 남은 치아가 얼마 없어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걸 강 할머니는 내내 안타까웠다. 혹시 중국 정부로부터 연금이나 생활 보조금이라도 받느냐고 물었더니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중국인 위안부 피해자의 삶은 열악하다. 사회적 관심의 대상에서도, 정부 지원의 대상에서도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강 할머니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동병상련의 다른 위안부 할머니와 함께 기거하고 수요집회에 나가 목청 높여 일본을 성토하기도 하지만, 줘 할머니는 혼자 아픔을 삭히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강 할머니는 줘 할머니와 헤어진 다음에야 참았던 눈물을 훔쳤다. “젊은 날 그렇게 고생해 놓고 구십 평생 한풀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다니….”

상하이=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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