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英노동당 당수, 국가 제창 때 노래 안 불렀다가 몰매

중앙일보

입력

16일 자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도하 신문들의 1면을 장식한 사진이 있으니 노동당 새 당수인 제러미 코빈이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점잖기로 유명한 파이낸셜타임스도 1면에 조그맣게 썼다.

전날인 15일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에서 열린 브리튼 전투 75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가(國歌)인 ‘여왕 폐하 만세’(혹은 ‘신이시여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를 제창하던 장면이다.

브리튼 전투는 1940년 나치 독일과 영국이 런던 상공에서 벌였던 공중전이다. 당시 영국은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던 유일한 서방국가였다. 미국은 1942년에야 참전했다. 사실상 명운을 걸고 홀로 고군분투하던 때다. 당시 런던 도심 대부분은 박살났다. 윈스턴 처칠 총리가 공습으로 인한 화마로부터 “(우리의 상징인)세인트폴 성당만은 사수하라”고 엄명을 내린 일도 있다.

세인트폴 대성당에서의 기념식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게다. 그런 자리에서 코빈 당수가 침묵을 택했다. 처음 행사 사진이 공개된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코빈 당수가 국가를 부르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언론들이 다루기 시작했다. 이날 저녁엔 그의 대변인이 “존중하는 의미에서의 침묵”이었다고 해명했다.

코빈은 행사 참석에 앞서 성명을 내고 “내 어머니는 공습감시원이었고 아버지는 향토군이었다. 그 세대 모든 분들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파시즘 격퇴를 위해 굉장한 용기와 결심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본토 항공전에서 보여준 공군의 영웅적 행위에 엄청난 감사의 빚을 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가를 부르진 않았다. 군주제 폐지론자인 신념 때문일 것이란 추측이 나왔다.

당장 애국심을 문제 삼는 발언들이 나왔다. 처칠 총리의 외손자인 니컬러스 솜스 보수당 하원의원은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것은 여왕과 본토 항공전에 참여한 조종사들에게 매우 무례하고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극우성향의 영국독립당(UKIP) 당수 나이젤 파라지도 “노동당 의원 중에도 코빈의 침묵을 용납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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