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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전교 10등인데 대학 못 가는 고3 줄리, 합법 체류 기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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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검은 피부에 큰 눈, 배배 꼰 레게 머리의 고3 소녀 줄리(18). ‘고향’은 서울이고 지금은 전남에서 학교에 다닌다. 불법체류자인 나이지리아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적은 전교 10등. 특히 국어는 거의 틀리지 않는다. 문학을 좋아해 책을 많이 읽은 덕이다.

 아버지는 강제출국 당했고 경기도의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는 2주에 한 번 집에 온다. 아홉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동생 넷을 돌보는 건 온전히 줄리의 몫이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해 전교 10등을 유지한다. 부모가 불법체류자지만 똑똑하고 착해 주변의 도움으로 정규 고등학교에 다닌다.

 꿈은 비서다. 나이지리아인 어머니에게 배운 영어가 자신 있어 생긴 꿈이다. 자원봉사로 교회에서 초등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칠 정도다. 담임 교사는 “실력으로 보면 비서가 되겠다는 건 ‘꿈’이 아니라 합당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꿈, 그것도 이뤄질 수 없는 꿈이 될 공산이 크다. 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또 대학에 갈 때면 강제 출국 대상이 된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면 길이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 계속 공부한다. 줄리는 말했다. “나의 현재는 동생들이 곧 맞이할 미래예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어요.”

 줄리의 담임은 “줄리 같은 아이에게는 이 땅에서 대학에 가고 생활할 수 있도록 선별적으로 허용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외를 계속 허용하면 법·제도 자체가 존재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이와 관련, 연세대 김현미(문화인류학) 교수는 “곧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어 노동력이 부족해질 한국은 외국 인력을 끌어들이는 시스템을 지금부터 정비해야 한다”며 “불법체류자와 국적 없는 아이들을 선별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체계 역시 그런 시스템의 하나로 만들어져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전남대 신지원(사회학) 교수는 “인권을 보호하는 나라로서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서도 무국적 아동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중앙대 김성천(아동복지학) 교수는 “미래 관계를 생각해 선진국이 신흥국(개발도상국)의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하지 않느냐”며 “멀리 가서 할 것 없이 무국적 아동에 대해 비슷한 정책을 펼치면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 부모와 그 자녀인 무국적 아동이 한국에 합법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있도록 허용하는 데는 기준이 필요하다. 한양대 차윤경(교육학) 교수는 “미국은 불법·합법을 합쳐 5년 이상 머물면서 범법행위가 없었고 불법체류 동안 내지 않은 소득세 등을 한꺼번에 내면 영주권을 주는 쪽으로 최근 이민법을 개정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이어 “한국 국적을 주지는 않더라도 이런 기준을 참고해 합법 체류자로 신분을 바꿔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모가 합법 지위를 얻으면 자국 대사관에 자녀 출생신고를 할 수 있어 자녀도 국적을 얻게 된다. 합법 체류자가 되면 불법일 때 내지 않던 소득세 등을 내게 돼 국가 세입에 보탬이 되는 효과도 있다.

 이주외국인들을 많이 상담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소라미 변호사는 이에 더해 “본국에 가면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경우 등에도 특별체류 자격을 주는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체계를 갖추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때까지 임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무엇보다 불법체류자 자녀라도 유엔 아동권리협약에 따라 출생등록을 받아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래야 등록번호가 생겨 보육과 교육 서비스 등을 받을 틀을 마련할 수 있다.

 외국인 근로자 지원단체인 ‘아시아의 창’ 이영아 상임이사는 “당장 출생등록을 받을 수 없다면 보건소에서 부여하는 ‘임의번호’를 등록번호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아기를 낳았을 때 보건소에 부모 여권을 가지고 가면 필수 예방접종을 무료로 해준다. 비자에 명시된 체류기간이 지나 불법체류 상태가 됐더라도 예방접종은 가능하다. 이럴 때 보건소에서 아기 예방접종 관리를 위해 ‘임의번호’란 것을 부여하는데, 이를 아기의 출생등록번호처럼 사용하자는 주장이다. 이 상임이사는 “주민등록번호 대신 임의번호로도 인터넷 가입 등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편하자”고 했다.

◆특별취재팀=최종권(팀장)·임명수·조혜경·김호·유명한 기자, 이성은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사진=신인섭·오종택 기자, 프리랜서 오종찬·김성태, VJ=김세희·김상호·이정석, 영상편집=정혁준·김현서, 디지털 디자인=임해든·김민희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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