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박 대통령의 유토피아적 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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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중국 9·3 전승절에 가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을 하고 돌아온 뒤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말이 부쩍 많아졌다. 어세도 매우 강하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건 거의 확실하다. 아마도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박 대통령은 “핵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이고 가장 빠른 방법은 평화통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핵 문제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이 어리둥절 놀라고 있다. 통일로 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북핵 해결이 통일의 전제조건이라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뒤집는 놀라운 발상이기 때문이다.

 평화통일이 되면 당연히 핵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 ‘어떻게(How)’가 빠졌다. 그건 “저 강을 건너면 낙원이 있다”는 유토피아적인 사고요, 의미상으로는 동어반복이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통일을 위해 북한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동북아 국가들,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을 상대로 치열한 통일외교를 펴겠다는 의지의 표현 같은데 핵 문제 해결과 통일의 선후관계를 바꾸어 적극적인 통일외교를 펴기로 한 동기가 궁금하다. 박 대통령과 시진핑이 오찬회담을 한 뒤 발표한 공동발표문에도 답은 안 보인다. 중국 측 입장은 “한반도가 장래에 한민족에 의해 평화적으로 통일되는 것을 지지했다”로만 표현돼 있다.

 오히려 이 문장에서 “장래에”라는 표현과 “한민족에 의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중국 측은 통일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오는 것, 남북한의 공동 노력으로만 실현되는 것이라는 인식을 이 짧은 문장에 반영시켰다. 공개되지 않은 박근혜-시진핑의 깊은 대화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북·중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중국이 이 시점에서 한국의 강압적인 통일을 지지·격려했을 리가 없다. 한국에는 그럴 힘도 없다.

 어떻게 평화통일을 하겠다는 것인가. 비전도 전략도 제시되지 않은 채 아직은 통일의 말만 무성하다. 박 대통령은 최근 들어 참모들에게 통일에 대비하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의 통일준비위원회 회의에서는 박 대통령이 통일 대비를 당부하면서 “내년에라도”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회의 참석자가 전했다. 정부의 고위 정책당국자는 정부의 통일정책이 북한의 붕괴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지뢰 도발 뒤에 열린 남북한 고위당국자 접촉의 8·25합의를 우리의 승리로 이해하여 대북 자신감이 고조된 인상을 준다. 작은 성취가 자만을 부른다. 성공의 저주를 경계해야 한다. 8·25합의가 승리라면 남북한 양쪽의 승리다. 북한은 예상대로 박 대통령의 잦은 통일 발언을 비판하고 있다. 8·25합의는 분명히 큰 성과다. 그 결과로 이산가족 상봉도 성사된다. 그러나 8·25합의는 이산가족 상봉을 넘어 남북관계 개선의 새로운 출발점이 돼야 한다. 그러자면 북한을 쓸데없이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언론은 박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의 대북·동북아 정책에 ‘박근혜 독트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독트린이 이름값을 하려면 먼로 독트린, 브레즈네프 독트린, 닉슨 독트린같이 대륙 규모 정책의 대전환, 해당 지역 다수 국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큰 흐름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제시하는 것은 강조점이 바뀐 대북정책일 뿐이다.

 박 대통령의 방중 후 발언에서 새로운 것이 있다면 동북아협력의 강조다. 그건 이미 제안된 동북아평화협력기구(동평구)의 재탕이지만 “우리민족끼리”나 “우리의 자주적인 힘으로” 통일한다는 말의 비현실성, 통일은 남북한과 주변 4강의 2+4의 합작으로만 가능하다는 현실을 반영한 구상이다. 독일의 경우 빌리 브란트는 독일 통일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소련의 의사에 반해서, 소련의 협력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동독에 20~22개 사단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소련은 언제든지 시민혁명을 탱크로 진압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통일의 열쇠를 독점하고 있는 ‘모스크바’가 없다.

 우리의 통일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서울과 평양에서 시작하여 미국·중국·러시아·일본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 완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할 일은 남북한 8·25합의의 오솔길을 큰 틀의 관계 개선과 협력의 대로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자면 통일이라는 말도 국내정치에 꼭 필요한 만큼만 사용하고 남발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은 남한이 말하는 통일은 흡수통일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말하는 통일은 당연히 적화통일이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하의 통일과 북한의 적화통일이 수렴(converge)이 가능하다고 해도 거기에는 긴 평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