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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대학생 연인, 장우산 가져간 것은 실수"…이유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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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우산 사건’

2013년 9월 어느 흐린 날. 대학생 연인 박모(여)씨와 김모(남)씨는 경북 구미시의 N카페를 찾았다.

빙수를 먹으러….

두 사람의 손엔 각각 우산이 들려 있었다.

한 그릇을 비우고 나와 버스터미널을 향해 30분쯤 걸었을 무렵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치려는 순간 ‘아뿔사….’ 두 사람은 당황했다.

까페에서 들고나온 우산 하나가 엉뚱한 우산이었던 것.

‘카페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버스 시간이 다 됐다. 눈을 감고 버스에 올랐다.

며칠 후 두 사람은 경찰로부터 소환 통지를 받았다. 3만원짜리 골프 우산을 잃어버린 최모씨가 ‘엄벌’을 요구하며 고소했던 것. 결국 두 사람을 조사한 경찰은 ‘기소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적용된 죄명은 ‘특수절도’. 박씨가 최씨의 우산을 우산꽂이에서 뽑아 김씨에게 전달한 장면이 CCTV에 찍힌 게 결정적 증거였다. 검찰은 두 사람에게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다. 두 사람이 공모해 고의로 우산을 훔쳤다고 본 것이다.

기소유예처분으로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아 벌금이나 징역을 받을 일은 없었지만, 3년간 수사경력자료에 남아 공무원 임용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대학생인 이들의 진로에 어둠이 깔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억울했다.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은 헌법재판소였다.

헌재는 지난 7월30일 이들의 헌법소원 청구를 받아들여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했다. “절도의 고의나 적극적 공모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데도 기소유예처분을 한 것은 이들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2. ‘고양이를 부탁해’사건

동물애호가 최모씨는 2012년 10월 자신이 기르던 길냥이 ‘포비’를 박모씨에게 입양보냈다.

이듬해 9월 박씨로부터 “고양이를 잃어버렸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최씨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제대로 본때를 보이겠다. 포비를 반드시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야 끝난다”는 이메일을 박씨에게 보낸게 화를 불렀다. 박씨의 고소로 시작된 최씨의 협박혐의에 대한 수사는 2014년 7월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으로 일단락됐다.

당혹한 최씨를 구제한 것도 헌재였다. 헌재는 지난 2월“일시적인 분노로 고양이를 구조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한 것에 불과하다”며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했다.

최근 헌재가 검찰의 기소유예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처분을 취소하는 인용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2008년 2.8%에 불과했던 것이 지난해에는 10.9%, 올해 상반기에는 15.7%까지 늘었다.

헌재 취소결정의 결론부에는 늘 “자의적 검찰권 행사”라는 말이 붙는다. 기소편의주의 원칙에 따라 기소여부 판단에 대해 검사에게 주어진 재량권을 남용했다고 결정하는 것이다.

왜 검찰의 대표적인 ‘선처행위’인 기소유예처분에 대한 취소율이 늘어나는 걸까.

최근 개업한 검사출신 변호사는 “경미한 사건인데 증거자료들이 엇갈리는 경우 실무상 편의적으로 기소유예처분을 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털어놨다.

‘우산 사건’에서 김씨는 경찰 수사에서 “가지고 갔던 우산이 하나는 길쭉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접이식은 아니지만 이보다 짧은 것”이라고 진술했다. 검찰은 검찰은 “짧은 우산과 긴 우산을 가져갔던 사람이 긴 우산 두 개를 가져갔다면 고의적인 것”이라고 봤지만 헌재는“접이식 우산이 아니라 약간 짧은 정도라면 오인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절도의 고의를 부정했다.

‘고양이…사건’에서도 협박의 고의를 인정할 건인가가 문제였다. 검찰은 최씨가 이메일에 이어 고양이 분실을 강하게 비난하는 문자메시지를 수차례 보낸 것에서 고의성을 봤다. 하지만 헌재는 협박성 이메일 이후에 사과하기 위해 보낸 메일에 가치를 뒀다. ”행위 전후 상황을 종합해 보면 협박 의사를 인정하기 어렵다”게 헌재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기소유예처분 취소율 증가세에 대해 법무부는 “기소권 남용이 느는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법무부 관계자는 “2012년도 이후 도로법위반 양벌규정 등 기소유예 처분의 근거가 되는 일부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서 ‘근거 법률이 위헌’이라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에 대한 인용율이 높아졌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불기소처분 취소 위한 헌법소원 한때는 헌재의 효자, 이제는… ?

1995년7월19일자 중앙일보

1988년 헌재가 문을 연 이래 가장 많았던 사건 유형은 단연 검찰의 불기소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사건이었다. 올해 상반기까지 접수된 2만1774건의 전체 사건 중 1만1767건(약 54%)에 달했다.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처벌을 원하는 자를 왜 기소하지 않느냐”는 유형과 “기소유예처분도 억울하다”는 유형이다. 첫번째 유형은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해 고소인이 고등법원에 불복을 구하는 재정신청제도가 2008년 시행되면서 거의 사라졌다. 고소인이 검찰의 기소를 강제하기 위해 헌법재판소를 찾을 일이 없어진 것. 청구를 하더라도 “헌법소원 외에 다른 구제절차가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 각하된다.

재정신청제도의 도입으로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청구 건수는 한 해 최대 1200여건(2007년)이르던 것이 300~400건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헌재에 연간 접수되는 사건의 30% 안팎에 이르는 높은 비중이다.

헌법재판소가 이렇게 개인들의 작은 응어리를 풀어주는 일에 힘을 쏟게 된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이유는 대법원이 “검사의 불기소처분은 행정소송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권리구제를 위한 헌법소원 청구는 ‘다른 법률이 정한 구제절차를 모두 거친 후’(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만 제기할 수 있다. 그런데 법원이 불기소처분이 억울하다는 청구를 심리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헌법소원의 요건이 충족되는 것이다.

헌재 설립 초기 불기소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은 헌재에도 효자였다. 검사의 불기소처분을 취소하고 재수사를 명령한 첫 결정은 1989년 7월에 나왔다. 헌재 관계자는 “이같은 유형의 헌법소원을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며 “허용 후 예상보다 많은 사건이 몰렸고 이 가운데 굵직한 사건들이 포함되면서 헌재의 존재의미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키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1995년7월19일자 중앙일보

대표적인 게 5.18 광주민주항쟁과 관련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각종 혐의에 대해 검찰이 내린 불기소 처분(공소권 없음)에 대한 헌법소원이었다. 1995년 7월에 제기된 사건이었다.

당시 검찰은 1년반에 걸친 5.18 수사의 결과발표에서 “80년 당시 벌인 비상계엄령 전국확대와 정치활동금지 등 각종 행위와 조치는 정치적 변혁 과정에서 새 헌법질서 형성의 기초가 된 일”이라며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자 고소인들은 “불기소처분을 취소해달라”고 헌재로 달려갔다. 결국 헌재 결정에 앞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헌법소원은 취하됐지만, 헌재가 불기소 처분을 취소할 것이라는 입장을 수차례 드러냈던 것은 김영삼 정부의 특별법 제정에 탄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군사정부 시절 쌓였던 자의적 검찰권 행사에 관한 불만도 해소되고 재정신청 제도가 자리잡힌 요즘. 기소유예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헌법소원은 헌재에 또 다른 고민을 던지고 있다. 또 다른 헌재관계자는 “사건을 들여다 보면 당사자 입장에서 억울한 기소유예처분이 적잖은 게 현실”이라면서도 “대부분 사건이 경미하고 기소유예처분의 불이익도 잠정적인 것이어서 과연 헌재가 나서야할 문제인지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있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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