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쇼크 내다본 듯 … 일찌감치 중국서 짐싼 리카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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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발 ‘퍼펙트 스톰’ 우려에 전 세계 투자자가 떨고 있다. 하지만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에도 편히 발 뻗고 잠을 청할 사람도 있다. 아시아 최고 부자인 리카싱(李嘉誠·87) 청쿵(長江)그룹 회장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발 빠르게 중국과 홍콩의 자산을 줄여왔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 투자를 점진적으로 줄이고 유럽으로 핵심 투자 지역을 옮긴 리카싱의 선견지명이 주목받고 있다”며 “투자자들 사이에 ‘리카싱 신탁(神託)’이란 말이 나올 정도”라고 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그의 선택이 너무나 용해 신의 계시를 받고 한 것 같다는 얘기다. ‘상신(商神)의 클래스’를 제대로 증명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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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카싱은 올 1월 자신이 이끄는 홍콩 최대 기업인 청쿵 그룹의 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산하의 부동산 투자회사 청쿵 실업과 항만·통신·소매사업을 관할하는 허치슨 왐포아를 합병한 뒤 부동산과 비부동산 사업으로 나눠 2개의 지주회사(CK부동산과 CKH홀딩스)로 재편했다. 신규 지주법인은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케이맨제도에 등록했다. ‘홍콩 엑소더스(탈출)’의 공식화였다.

 홍콩에서만 발을 뺀 것이 아니다. 2011년부터 중국에서 부동산 자산을 줄여 왔다. 2011년 항만업체인 허치슨 포트홀딩스 지분 62%를 55억 달러(약 6조6200억)에 매각했다. 또 후이셴 부동산신탁 지분 40%를 16억 5000만 달러에 팔았다. 지난해에는 소매 체인인 A.S 왓슨(56억8000만 달러)과 전력회사인 홍콩일렉트릭(31억 달러)을 처분했다. 리카싱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 처음 들어간 외국인 개발자였다. 하지만 2012년 이후 중국에서 눈에 띄는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의 탈(脫) 중국은 끝나지 않은 듯하다. 요즘 상하이 푸둥 금융중심가의 상업단지 센추리링크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2008년 상하이 금융구역 내 40층 빌딩 매각은 ‘투자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리카싱의 동물적 감각을 보여준다. 당시 49억 위안에 매각했던 이 빌딩은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며 3년뒤 44억 위안에 되팔렸다. 우디 우 홍콩중문대 교수는 WSJ과의 인터뷰에서 “리카싱의 가장 뛰어난 점은 매각 시점”이라며 “금융에 관해서는 천재라 할만하다”고 말했다.

 중국을 떠난 그가 새롭게 개척한 땅은 유럽이다. WSJ은 “리카싱이 최근 18개월간 유럽 기업의 인수 등에 200억 달러가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영국 2위 통신사업자인 O2를 인수하는 데 157억8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영국 철도그룹인 에버숄트 레일그룹도 38억500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다. 이같은 투자처 조정으로 지난해 허치슨의 영업이익에서 유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42%까지 늘면서 범중화권(30%)을 앞질렀다.

 리카싱의 ‘중국 탈출’과 관련해 지난해 홍콩 민주화 시위 이후 현 중국 지도부와의 갈등이 커진 탓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WSJ은 리카싱 측근의 말을 인용해 “투자 비중의 조정은 중국 시장의 붐이 끝물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유로화 약세로 유럽 자산이 중국보다 싸진 데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유럽이 중국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상신’의 판단은 일단 성공적으로 보인다. 중국과 홍콩의 비중이 줄면서 리카싱은 7월 이후 본격화한 ‘차이나 쇼크’에서 한 걸음 비껴선 듯한 모습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 1월 305억 달러던 그의 자산은 7일 기준 315억 달러로 늘어나며 세계 억만장자 17위에 이름을 올랐다. 주식 시장의 급락으로 중국 부호의 자산이 쪼그라든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하현옥 기자 hyuno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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