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한국인 헐크? 헐크 한국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나보다 위 연배의 선배 중엔 영어가 안 통해 외국에서 봉변을 겪은 일화 하나쯤은 대부분 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인근 펍에서 분명히 맥주를 시켰다더니 콜라를 흑맥주라며 받아온 선배도 있었다. 그런 웃픈(웃기고도 슬픈)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압권은 모 선배의 캐나다 입국심사 에피소드였다. 뭔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찍어달라는 입국 도장은 안 찍어주고 자꾸 뭔가를 묻더란다. 하도 시간을 질질 끌길래 화가 치밀어 “나 정말 화났거든(I’m angry)”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정작 입에서 튀어나온 건 “아임 헝그리!(I’m hungry, 나 배고파)”. 그런데 실수로 튀어나온 이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통과시켜 주더란다. 오죽 배가 고팠으면 이렇게 화가 났을까 하고 이심전심 이해한 걸까.

 한동안 잊고 있던 이 얘기를 다시 떠올린 건 지난달 옥스퍼드 온라인사전의 신조어 리스트에 오른 ‘행그리(hangry)’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헝그리와 앵그리를 결합한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배고파서 짜증 난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남자들이 옆 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로 다리를 벌리고 앉는 행위를 일컫는 ‘쩍벌남’의 영어식 표현인 맨스프레딩(manspreading)에 밀려 국내 언론의 주목은 덜 받았지만, 누구나의 공감을 자아내는 기발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배고프면 누구라도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니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꼭 이렇게 배고프지 않아도, 다시 말해 별다른 이유 없이도 늘 화가 나 있거나 짜증을 내는 사람이 많다. 브루스 배너 박사(‘마블코믹스’의 만화 캐릭터)는 감마선 노출 부작용으로 아드레날린이 과도하게 분비될 때만 옷을 찢으며 초록색 헐크로 변신하지만 지금 우리 주위엔 사소한 자극에도 폭발해 헐크로 변하는 사람이 도처에 널렸다. 오죽하면 온 나라가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일까.

 그런 와중에 마블코믹스가 올 12월 선보이는 새 시리즈 『토털리 어섬 헐크(Totally Awesome Hulk)』에서 브루스 배너 박사를 대신할 2대 헐크로 한국계 미국인 천재 캐릭터인 아마데우스 조를 선정했다고 한다. 미국 만화 캐릭터일 뿐이고, 게다가 악역도 아닌 어벤저스 군단의 첫 한국계 수퍼 히어로라 일부에선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졌다고까지 얘기하지만 난 어째 자꾸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욱하는 한국 사람 성격을 남들이 다 알아차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