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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중국판 항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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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16세기 말 우리 역사에 큰 공을 세우고도 잊혀졌던 이들이 있다. 임진왜란 때 투항해 조선을 위해 싸웠던 왜병들이다. ‘항왜(降倭)’로 불리는 이들은 그 후 병자호란, 이괄의 난 때도 혁혁한 전과를 세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항왜는 한때 1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중 유명한 이가 가토 기요마사(加藤<6E05>正)의 우선봉장으로 3000명을 이끌고 왔던 김충선 장군이다. 사야카(沙也可)로 불렸던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 500명을 섬멸했다. 조선군에게 조총 제조법을 알려준 것도 김 장군이라는 게 정설이다.

 일본어엔 ‘네가에리(寢返り)’란 게 있다. 투항 후 적 편에 선다는 뜻이다. 우리말엔 딱 맞는 표현조차 없을 정도로 금기시되지만 일본에선 드물지 않았다. 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 때는 싸움에서 진 다이묘(大名·영주)와 최측근 가신들은 할복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을 섬겼던 사무라이(하급무사)들은 달랐다. 적의 우두머리를 새 주군으로 삼는 게 관례였으며 수치도 아니었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중일전쟁 때도 일본군들의 전향은 적지 않았다. 일본군 포로의 상당수가 중국 측의 인간적 대우에 마음을 바꿨다. 지난 3일 중국에서 열린 항일 승전 70주년 열병식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에게 훈장을 받은 고바야시 간초(小林<5BDB>澄·96)도 그중 하나다. 고바야시는 팔로군에 붙잡힌 뒤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중국 측의 간호로 목숨을 건졌다. 결국 그는 팔로군에서 일본어 삐라를 만들고 일본군 포로를 회유하게 된다. 고바야시처럼 중국을 도왔던 일본인은 적잖았다. 일본 패망 후 귀국한 이들은 ‘일본팔로군·신사군전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금껏 중·일 우호에 앞장서고 있다.

 김 장군이나 고바야시가 투항한 이유는 비슷하다. 김 장군은 늙은 부모를 엎고 도망치는 조선 백성들을 보고 투항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런 효심 깊은 예의지국을 침략하는 건 의롭지 않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고바야시 역시 “일본군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된 마을과 살해된 중국인들을 보곤 잘못된 전쟁임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임진왜란과 일제의 중국 침략 모두 의롭지 않음을 적잖은 일본인이 절감했다는 얘기다.

 한·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현 시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김충선·고바야시처럼 불의를 못 참는 양심적인 일본인도 많다는 사실이다. 한·일 간 평화의 상징으로 떠오른 김 장군을 모신 녹동서원에는 매년 2000명 이상의 일본인이 참배하고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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