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 증산만 외치던 사우디, 제동 걸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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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전쟁 전선이 심상찮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 알리 알나이미(80)가 미국 에너지 업계를 겨냥해 구축한 전선에 균열 조짐이 나타나서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석유수출국기구(OPEC) 기관지인 ‘OPEC 불레틴(Bulletin)’에 의미심장한 보고서가 실렸다. “OPEC이 다른 원유 생산국가(비OPEC 산유국)들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는 내용이었다. 원유 생산량 감축(감산)을 위해 협상할 뜻이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감산은 석유전쟁의 반대말이나 다름없다. 알나이미는 지난해 11월 OPEC 회의에서 가격 유지를 위한 감산 대신 생산량 유지를 관철시켰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 일부 회원국이 반발했다. 하지만 OPEC의 맹주인 사우디 알나이미의 목소리에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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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는 OPEC 회의 이후 생산량을 늘렸다. 가파른 증가세인 미국 원유 생산량을 능가하는 증산이었다. 결과는 국제유가 추락이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당시 보고서에서 “OPEC이 가격 유지 및 상승을 위한 카르텔로서의 성격을 포기했다”고 평했다. 가격 대신 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석유전쟁은 알나이미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미국 셰일 에너지회사들이 적잖이 채굴을 포기했지만 원가 경쟁력을 갖춘 셰일 에너지 회사들은 오히려 원유 생산을 계속 늘렸다. 그 바람에 “원유 가격이 많이 떨어져 대부분 신흥국인 원유 생산국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다. 원유 개발 투자도 줄었다. 미래에 원유 공급이 안정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수도 있다(OPEC 불레틴).” 이는 감산파인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이 평소 주장한 내용이다.

 OPEC 기관지가 맹주인 사우디 논리와 다른 목소리를 게재한 건 흥미로운 단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날 원유 투자전략가의 말을 빌려 “OPEC 컨센서스가 바뀔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풀이했다. OPEC이 원유 가격 유지·인상을 위한 카르텔이란 본래 성격을 회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감산을 위한 움직임도 포착됐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2~3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릴 전승절 기념식에서 만나 석유 감산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한 OPEC 간부는 감산 논의와 관련, “OPEC만으로는 안 되고 비OPEC 산유국, 주로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감산은 현재까지는 가능성일 뿐이다. 사우디가 아직 태도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 서부텍사스유(WTI) 값이 지난달 31일 8.8%(3.98달러)나 오른 배럴당 49.2달러를 기록, 50달러 선 회복을 눈앞에 뒀다. 이날까지 3거래일간 상승폭은 27%에 달했다.

 톰슨로이터는 “EIA가 미국의 6월 원유 생산량이 하루 930만 배럴로 30만 배럴 줄었다고 발표한 것도 유가 반응에 한몫했다”고 전했다.

 미 원유 생산량 감소가 일시적일지 아니면 지속적일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다만 에너지 정보회사인 플래츠는 최근 보고서에서 “셰일 에너지 회사들이 유가가 조금만 올라도 신속하게 원유와 가스 채굴을 재개할 수 있다”고 했다. 생산량 감소가 일시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플래츠는 “중국 경제가 회복해 원유 수요가 눈에 띄게 늘지 않는 한 가격 상승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서울=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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