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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미당·황순원문학상] 본심 후보작 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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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러운 세상, 서럽지 않게 말하다
시 - 정끝별‘발’외 12편

내가 맨발이었을 때 사람들은 내 부르튼 발아래 쐐기풀을 깔아놓고 손가락 휘슬을 불며 외쳤다

춤을 춰, 노랠 불러, 네 긴 밤을 보여줘!

봄엔 너도 피었고 나도 피었으나 서로에게 열리지 않았다 나는 너의 춤과 노래가 되지 못했고 너는 투덜대며 술과 공을 찾아 떠났다

가을에도 우리는 쌓이지 않았다

가까이 온 발자국은 너무 크거나 무거웠으며 멀리 간 발자국은 흐리거나 금세 흩어졌다

헤이, 춤을 춰, 네 발을 보여줘! 여름내 우는 발은 지린 눈물냄새를 피웠고 겨우내 우는 발은 빨갛게 얼음이 박혔다

중력에 맞서면서부터 눈물을 흘렸으리라

두 발이 춤 아닌 날갯짓을 했을 때 보았을까 발아래가 인력의 나락이었고 애초에 두 발이 없었다는 걸

너를 탓할 수 없다 따로 울지 않으려 늘 우는 발을 탓할 수도 없다 대개가 착시였고 대가였다

바닥의 총합이 눈물의 총량이었다

정끝별(51·사진)의 시에는 약하고 소외된 것들을 보듬는 젖은 시선과 따스한 품이 있다. 이 시인을 지칭하는 말 중에서 ‘사랑의 시인’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누추한 삶에 대한 애정이 그저 연민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정끝별은 서러운 세상을 서럽지 않은 방식으로 말하려 애쓰는 시인이다.

 이러한 전체적 인상과는 달리 정끝별 시의 내부는 소재 면에서나 주제 차원에서 풍부한 다양성을 품고 있다. 자연과 인간사와 문명의 숱한 양상들이 작품에 소개되고, 이들은 또 공감과 비애와 비판의 시각으로 세공된다. 여기에 시적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특유의 활기찬 상상과 발랄한 언어 구사이다. 은유적 상상력의 테두리 안에서 솟아나는 발견의 순간들, 이를 이끌어가는 경쾌한 구어의 리듬, 그리고 기지 넘치는 말놀이를 근거로 우리는 이 시인을 단정하고 예리한 서정시의 생산자이자 온건한 언어 실험가라 말해볼 수 있다.

 이번의 후보작들은 사실의 직접적 제시를 자제하여 문맥의 투명도가 다소 낮아져 있다. 그 결과 사물과 인간, 말과 사물의 경계가 흐려져 시는 좀 더 아련한 풍경을 이루는 것 같다. 세심한 관찰을 통해 대상들의 숨겨진 속성을 찾아내고, 다소 익숙한 유추를 통해 이를 시화(詩化)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방법이었다면, 이제 시인은 은유의 그물을 쉽사리 펼치지 않으면서, 좀 더 낯설고 독자적인 세계를 지향하려 하는 듯하다.

 의식을 얼마간 꿈꾸는 듯한 상태에 두고 계획 없이 흘러나오는 말들이 저절로 흩어지고 뭉쳐지게 두는 것은, 기존의 시 관념을 덜 믿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시를 더 믿는 자세일 터이다. 더 멀리 보고 더 깊이 들으려면 명징한 의식과 분명한 감각에 대한 믿음을 얼마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이 시인의 시에서 감지되는 체질 변화의 기미에 관심과 기대를 갖게 된다.

이영광(시인) 

◆정끝별=1964년 전남 나주 출생. 88년 ‘문학사상’에 시, 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 등단. 시집 『은는이가』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등.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잃어버린 삶, 되찾으려는 사람들
소설 - 조해진‘사물과의 작별’

조해진(39·사진)의 소설은 사회성이 짙고 서사가 단단한 편이다. 얼핏 낡은 듯 보이지만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제 길을 걸어온 이 작가의 간단없는 창작열은 세월호 참사 이후 새로운 사회성의 출현을 고대하는 독자들에게 새삼스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사물과의 작별’은 발표 당시부터 평단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소설적 개연성과 상징적 의미 사이의 연관을 빈틈없이 조직하는 작가의 솜씨가 원숙하게 드러난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에 정치범으로 옥고를 치른 재일 지식인 서군(君)과 그의 삶을 자신이 망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죄의식 속에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태영이 40여 년 만에 재회한다. 한 사람은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어가는 병을 앓고 있으며 다른 한 사람은 사라져가는 기억의 뒷모습을 무연히 지킬 수밖에 없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채였다.

 둘을 이어준 매개자이자 태영의 조카인 ‘나’가 지하철 유실물센터 직원이라는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관심사는 잃어버린 삶의 시간과 그 되찾음의 의미를 향해 있다.

 그 되찾음은 그러나 역사적 영웅이 아닌 어느 늦은 봄밤의 레코드점에서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청춘남녀의 시간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것은 물론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도 무방한 덧없는 조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빠져버린 역사란 ‘선반의 고정된 자리에서 과거의 왕국을 홀로 지켜가는’ 한갓 유실물에 불과한 게 아닐까. 개인사와 사회사는 보통 수직적으로 갈등하지만 ‘사물과의 작별’은 둘 사이의 수평적 균형을 잘 맞추고 있다. 실은 그 자체가 이 작품의 주제인지도 모른다.

강경석(문학평론가)

◆조해진=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천사의 도시』,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 『아무도 보지 못한 숲』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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