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추적] “범행 계획한 사람이 수면제 같이 먹었겠나” 여성 첫 강간 피의자 무죄 이끈 ‘송곳 변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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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김정윤(左), 김현정(右)

“본 재판부는 배심원단의 만장일치 된 의견을 존중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22일 오전 3시10분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417호 대법정.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부장 이동근)가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강간죄로 기소된 전모(45·여)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 순간, 변호인석에 앉아 있던 김정윤(40·사법연수원 35기), 김현정(33·변호사시험 1회) 국선 전담 변호사가 먼저 눈물을 쏟았다. 피고인 전씨도 재판부를 향해 엎드려 큰절을 하며 흐느꼈다.

 이날 전씨에겐 ‘여성 최초 강간 혐의 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가 지난 3월 말 기소할 때부터 언론에 보도되면서 재판 결과에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전씨 변론을 맡은 두 여성 변호사가 지난 20~21일 진행된 국민참여재판에서 사건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전씨의 혐의는 불륜관계인 유부남 A씨(51)에게 수면유도제 졸피뎀을 먹인 뒤 양 손발을 묶고 성관계를 시도한 것(강간 미수)과 이후 잠에서 깨어 저항하는 A씨를 둔기로 내리쳤다는 것(흉기 등 상해)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난해 8월 18일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11시간 동안 피해 남성은 영화 ‘미져리’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경험을 한 셈이다.

 지난 3월 이 사건을 맡은 김정윤 변호사가 서울구치소에서 처음 전씨를 접견했을 때만 해도 전씨는 모든 걸 체념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미 구치소에 소문이 나 동료 재소자들이 “남자를 강간한 여자”라며 손가락질했다. 전씨의 첫 마디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아닌가요”였단다.

 하지만 전씨는 구체적인 사건 얘기로 들어가서는 강간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김정윤 변호사는 “키 1m51㎝, 몸무게 44㎏에 불과한 여성이 건장한 체격의 A씨를 강간하려고 시도하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며 “A씨 진술에 이상한 부분이 있으니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현정 변호사도 “사건 당일 전씨 집에서 나온 홍삼액, 베개와 이불에 묻은 혈흔 등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를 무심코 보다가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고 기억했다. 베개와 이불에서 확보된 피고인 전씨의 혈흔에서 졸피뎀이 검출된 것이다.

 두 변호사는 이날 재판에서 ▶전씨에게 강간의 고의가 없었고 실제 강간 행위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둔기를 휘두른 것 역시 정당방위였다고 배심원단을 설득했다.

 특히 김현정 변호사는 전씨에게서도 졸피뎀이 검출된 사실을 지적하며 “강간하려는 사람이 수면유도제를 먹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으냐”며 “전씨에게 강간 고의가 없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강조했다. 초동수사를 담당한 경찰은 피해자 A씨의 혈액과 소변만 국과수에 분석차 보내 졸피뎀이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작은 체격의 전씨가 A씨를 제압하기 위해 수면유도제를 탄 홍삼액을 마시게 하고 양 손발을 묶은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두 변호사는 또 전씨의 혈흔이 A씨의 것보다 이불 등에 훨씬 많이 묻어 있는 현장 사진도 제시했다. 검찰은 당초 A씨가 결박된 상태에서 ‘계속 만나자’는 요구를 거절하자 전씨가 둔기로 A씨 머리를 내리쳐 피가 많이 났다고 주장했지만 둔기에선 A씨의 DNA가 검출되긴 했어도 혈흔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김정윤 변호사는 “DNA는 땀에서도 검출될 수 있다”며 “사건 당일은 무더운 여름이었다”고 반박했다.

 검찰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전씨의 진술이 오락가락하자 변호인 측은 “전씨가 정신감정 결과 경미한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전씨와 A씨 부인의 통화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A씨의 나체 사진을 보내겠다고 협박을 하는 전씨가 지적장애로 보이느냐”고 몰아쳤다.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마무리되고 21일 밤 10시30분 김현정 변호사가 9명의 배심원단(남성 6명, 여성 3명) 앞에서 최후 변론을 했다. “TV 오락 프로그램 ‘복면가왕’처럼 이 사건도 피해자 A씨 뒤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숨겨져 있을지 모릅니다. 검찰 주장에 조금이라도 합리적인 의심이 들면 피고인은 무죄여야 합니다. 전씨에게 유죄가 선고되면 피고인은 한국의 첫 여성 강간미수자가 됩니다. 신중히 생각해주길 부탁드립니다.”

 배심원단은 이후 세 시간 동안 평의를 거쳐 22일 만장일치로 전씨에 대해 무죄를 결정했다. 재판부도 배심원단 의견을 수용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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