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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대기, 화장실 회의 … “삼성·현대차 신화 함께 일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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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서울 도곡동 블루버드 본사의 무선통신 실험실(OTA 체임버)에서 연구원이 산업용 단말기를 설치하고 있다. 위치가 상하좌우를 비롯해 60가지로 변해도 전파를 잘 수신하는지를 검사하는 실험이다.

삼성전자에 15년째 반도체 생산장비를 납품해 온 박경수(63) PSK 대표는 삼성 ‘반도체 신화’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으로 산다. 1991년 삼성전자 신문 광고에 ‘새벽 3시의 커피타임’이란 문구가 등장할 무렵 PSK 직원들도 24시간 ‘비상대기’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엔 삼성도 반도체 생산공정에 불쑥불쑥 문제가 터질 때가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우리 직원들이 달려가 삼성 직원들과 함께 문제가 뭔지 파악하고 해결하느라 며칠씩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그런 협력업체들의 노력 덕분에 지금의 삼성전자가 있는 것 아닐까요.”

 박 대표는 “삼성의 까다로운 품질 기준에 맞추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 기술력도 올라갔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반도체 생산 필수 장비인 감광액 제거기 분야 세계 시장점유율 1위(42%) 업체로 성장했다.

 전자·자동차·철강 같은 국내 대표 제조업체의 성공 신화에는 중소 협력업체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대기업이 기술력으로 승부할 수 있도록 내조한 제 2의 삼성전자·현대차·포스코 직원인 셈이다. 현대·기아차에 15년째 플라스틱 내외장재를 납품해 온 김진우(56) 나전 대표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술력에서 일본 차에 뒤졌던 현대차와 고락을 함께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당시 직원들과 일본 미쓰비시사로 기술 연수를 떠났던 일화를 들려줬다.

 “일본 업체에서 엔진 부품 사진을 못 찍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연수 도중 틈틈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했습니다. 직원들과 각자 기억해 온 엔진 부품 모양을 떠올려 메모지에 옮겨 적는 ‘화장실 회의’를 하기 위해서였죠.”

 그는 “요즘 도요타 같은 곳에선 현대차의 기술력을 의식해 우리 같은 한국 협력업체에서 (도요타) 협력사 공장에 방문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며 “5년 전부터 중국 하얼빈기차에 로열티를 받고 기술 전수를 하는 등 위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숨은 노력에 기아차는 신뢰로 보답했다. 2012년엔 생산공정에 문제가 생겨 기아차 광주공장 생산라인이 3시간 동안 멈출 ‘위기’가 닥쳤다. 협력사 대표로선 등골이 오싹할 일이었다. 그런데 기아차 직원들이 “불시에 일어난 사고다. 나전이 오랫동안 좋은 제품을 잘 납품해 왔으니 우리가 돕자”고 공장에 의견을 내 다른 차량부터 먼저 조립을 해 줬다. 김 대표는 3시간 만에 위기를 수습해 공장에서 플라스틱 부품을 찍어 내는 대로 밤새 승용차로 날랐다. 그는 “기아차 직원들과 함께 간다는 ‘형제애’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협력사뿐 아니라 고객사도 함께 간다. 포스코 철강제품을 20년 넘게 구매해 온 홍영철(67) 고려제강 회장은 “포스코 기술이 발전할 때마다 철강제품을 가공해 파는 우리 회사도 한 단계씩 성장했다”며 “최근엔 포스코와 글로벌 자동차 부품 시장에서 공동 마케팅을 한다”고 말했다. 조영삼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강소기업 덕분에 제조업 강국으로 우뚝 선 독일의 사례에서 배워야 한다”며 “‘히든 챔피언’이라고 부를 만한, 독보적 기술 우위를 가진 중소기업이 많이 나오도록 중소기업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특별취재팀=김준술(팀장)·함종선·문병주·구희령·황의영·한진·김기환·임지수 기자 jsool@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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