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도 채혈, 우르르 문병 … 메르스 잠잠하자 ‘고질병’ 재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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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병원들이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응급실 출입을 제한하고 있지만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 모습. [중앙포토]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의 주요 원인은 응급실 과밀화다. 메르스 확진자 186명 중 절반에 가까운 89명이 응급실에서 감염됐다.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이 도떼기시장처럼 한데 뒤섞이는 응급실이 감염의 온상이 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목한 한국의 메르스 전파 원인 중 핵심도 응급실 과밀화 등 한국의 독특한 병실문화였다. 가장 많은 환자를 감염시켰던 14번 환자(35)는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서 2박3일간 머물며 80여 명에게 전파했다.

응급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정부는 지난 18일 국가방역체계 개편 방안 공청회를 통해 응급실 개편안을 공개했다. 전국 21개 권역응급센터(대형병원 응급실)를 찾는 비응급환자의 부담(진료비의 50~60%)을 높이는 것이 골자다. 현재 대형병원 응급실이 위급하지 않은 환자가 입원하기 위해 대기하는 통로로 활용되면서 혼잡이 가중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현장 응급실은 이 같은 방침에 유연하게 적응할 준비가 돼 있을까. 중앙SUNDAY가 서울의 대형병원 응급실 세 곳을 집중 취재했다.

수액 맞으며 병원 돌아다니는 환자들
메르스 사태 이후 대부분 대형병원은 응급실에 보호자 1명만 머물 수 있도록 방침을 변경했다. 보호자에게 목에 거는 출입증을 배포하거나 출입문에 바코드 인식기를 설치하는 식이다. 가장 큰 변화를 준 곳은 메르스 전파의 온상으로 지목된 삼성서울병원이다. 응급실 입구부터 바뀌었다. 선별진료소를 신축해 모든 환자가 이곳을 거치도록 했다. 내부 병상도 분리용 격벽을 세웠고 환자 대기실 의자는 긴 벤치형에서 1인용 칸막이형으로 모두 교체했다. 응급실 입원 환자는 아직 많지 않았다. 20일 오후 4시쯤 찾아간 응급실은 16명이 입원 중이었다.

하지만 다른 대형병원은 사정이 달랐다. 이날 오후 3시 서울 강남의 A병원 응급실. 대낮인데도 복도와 진료실 근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입구에는 ‘보호자 1인 외에는 입원자 면회를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걸렸다. 20여 개쯤 되는 침대는 빈자리가 없었다. 가장 구석에 누워 있는 박모(73)씨 곁에는 안내문이 무색하게 네 명의 보호자가 몰려 있었다.

“다리가 아파 3일 전 경남에서 올라왔어. 입원하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한다는데 내려갈 수가 있어야지.”

박씨는 “입원시켜줄 때까지 응급실에서 기다릴 요량”이라고 말했다.
보호자 대기실로 나와 보니 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수액을 맞으며 돌아다니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한데 뒤섞였다. 충남에서 왔다는 김모(70)씨는 “온몸이 쑤시듯 아파 외래 진료를 받았는데, 입원하라는 이야기는 따로 없었다”면서도 “응급실에서 기다리다 보면 입원시켜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응급실에 아들이 입원 중이라는 김모(73·여)씨는 “하루 종일 입원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20일 0시10분쯤 찾아간 B병원 응급실은 입구에 아예 바코드 인식기를 설치했다. 병원 측은 “환자당 보호자 1명에게만 인쇄한 바코드를 발급해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내가 찍을 테니까 바짝 붙어서 따라 들어와.”

환자의 보호자로 보이는 40대 여성이 바코드 인쇄 종이를 대자 그 뒤로 세 명이 우르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응급실 안은 이미 만원이었고 긴 벤치에 아무렇게나 앉아 진료를 대기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간호사들은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의 팔목에 주삿바늘을 꽂고 혈액을 채취하거나 주사를 놓기도 했다.

응급실은 지금도 우회입원 통로
응급실 과밀화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전국 415개 응급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주요 대형병원의 응급실이 모두 비슷한 실정이었다. 서울대(175.2%)·삼성서울(133.2%)·서울성모(110.8%)·세브란스(105.5%)·서울아산(103.8%) 등 이른바 ‘빅5’ 병원 모두가 응급실 과밀화 지수가 100%를 넘겼다. 과밀화 지수가 100%를 넘으면 병상이 모자라 환자나 보호자가 응급실 복도나 외부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다.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 중에는 실제로 위급한 상황인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비응급환자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해당 병원에 입원 병실이 없어서 대기하기 위해 응급실에 온 경우(A병원 응급실 박씨와 김씨)가 대표적이다. 대형병원 같은 3차 의료기관에서 진료를 보려면 의원(1차)이나 중소형 병원(2차)에서 진료의뢰서를 받아와야 하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 응급실을 찾는 경우도 있었다. 일종의 대형병원 ‘우회입원’ 통로로 응급실이 활용되는 것이다. 2013년 복지부가 141개 응급의료기관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급실을 찾은 500만여 환자 가운데 4명 중 1명(24%)은 비응급환자였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요약하면 ‘경증 환자에 대해 대형병원 응급실 문턱 높이기’다. 경증 환자가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으면 현재보다 비용 부담을 높여 과밀화를 예방하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중소형 병원 응급실(전국 270개 지역응급의료기관)에 갈 경우에는 응급관리료(3만원)에 건강보험을 적용해 부담을 줄여주기로 했다. 비용을 얼마나 늘리고 줄일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임호근 복지부 응급의료과장은 “중증 환자에 대해서까지 비용을 물리겠다는 것은 아니라 비응급환자가 대상이 될 것”이라며 “9월 중 얼마 정도를 올리고 내릴지 안을 확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복지부 응급실 대책엔 구멍 숭숭
복지부의 대책에 대해 벌써부터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야간에 갑자기 아파도 근처 문을 연 동네병원이 없으니 응급실을 찾는데 환자 부담금만 올린다는 건 돈 있는 사람은 응급실을 이용하고 아니면 오지 말라는 얘기”라고 했다. 삼성서울병원 인근에서 만난 아파트 주민 강모(33·여)씨도 “네 살배기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면 갈 만한 곳이 집 앞에 있는 삼성서울병원밖에 없다”며 “지금보다 돈을 더 내라면 화가 나고 속상하겠지만 그래도 먼 병원까지 일부러 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응급실 현장에서도 회의적인 반응이 지배적이다. 의사협회 대변인 출신인 송현곤 경기도의료원 이천병원 응급의학과장은 “대형병원에서 3년째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열이 났다면 이 환자는 어쩔 수 없이 그 병원 응급실에 가야 한다”며 “이런 환자에게 단순 발열이라고 작은 병원으로 가라고 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응급실 과밀화 대책은 문턱만 높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대형병원에서 중증 환자만 보고 경증 환자는 1~2차 의료기관으로 보내도록 틀을 짜야 한다는 주장이다. 송 과장은 또 “대형병원에서 경증 환자를 1~2차 의료기관으로 보낼 때 받는 회송료가 일본은 10만원 정도인데 한국은 1만7000원에 불과해 현실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형병원이 경증 환자라도 작은 병원으로 보내기보단 주기적으로 관리해 진료비를 받는 것이 이득인 구조라는 지적이다.

장주영 기자, 윤수정 인턴기자(연세대 정치외교 4)
jang.jo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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