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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차별은 더 서럽다] 中. "후배 밑이면 어때…일 더 해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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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연봉은 20% 깎이고, 직급도 내려가고, 게다가 후배 밑에서 일해야 하고…. 그래도 계속 은행에 남아 있어야 하나'.

지난해 국민은행에서 인사 통보를 받은 2백92명의 지점장은 똑같은 고민을 해야 했다. 이 가운데 48명은 실제로 후배 지점장 밑에서 차장으로 일해야 했다.

국민은행은 3년 전부터 지점장을 지낸 고참 간부를 후배가 지점장으로 있는 점포에 차장이나 업무추진역으로 발령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하고 있다. 조기 퇴직 대상에 오른 나이 많은 간부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자는 취지다.

차장으로 발령되면 지점장보다 연봉이 1천5백만~2천만원 정도 깎이지만 퇴직 시점을 늦출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점이 있다.

李모(50)지점장도 지난해 지점장에서 업무추진역으로 '강등'되는 설움을 당했으나 1년간 실적을 쌓은 끝에 다시 복귀했다. 그는 "인사팀에서 명예퇴직과 보직 강등을 선택하라고 할 때 대부분 은행을 더 다니겠다고 대답한다"며 "다른 직장을 구해도 대개 보수가 적기 때문에 직급을 낮춰서라도 정년을 채우는 게 좋다"고 말했다.

"연봉제.성과급이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 기업의 임금은 호봉에 따라 정해지죠. 비슷한 업무능력을 갖고 있더라도 나이가 많을수록 임금은 물론 가족수당.자녀 학자금 보조 등 부대비용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 한 기업들은 나이가 많은 사람 순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기업의 인사 담당자의 말이다. 연령차별을 없애려면 먼저 이를 조장하는 연공서열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연공에 바탕을 둔 보상체제가 기업들이 고령자를 우선 퇴출시키는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기업이 임금.보직 등을 좀 더 유연하게 정할 수 있다면 조기 퇴직한 직원들을 재고용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 피크제와 보직 순환제가 확산될 분위기는 조성돼 있는 셈이다.

한국노동연구원이 1천4백여개 기업체를 상대로 실태 조사한 결과 27.7%는 예전 보수의 50~70%만 지급한다면 퇴직 직원을 재고용하겠다고 응답했다. 비정규직으로 재고용하겠다는 응답은 33.4%나 됐다.

이에 대해 조준모 숭실대(경제학)교수는 "일정 연령을 분기점으로 생산성에 맞게 임금을 깎을 수도 있고, 실적에 따라 올릴 수도 있는 임금조정옵션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임금 삭감 쪽에 비중을 둔 임금 피크제에 대한 노동계의 거부감을 무마할 수 있어 노사 간 합의만 하면 당장이라도 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업연령 제한과 관련해서는 역시 '장유유서'라는 유교적 전통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취업사이트 '잡링크'가 기업체 인사 담당자 1천여명을 대상으로 취업연령 제한의 이유에 대해 조사한 결과 인사 담당자의 60%가 "나이 많은 신입사원은 대하기가 불편하다"고 답했다. 둘째로 많은 30%의 응답자는 '조직 내 위계질서 유지'를 이유로 꼽았다.

대책 없는 조기 퇴직자나 청년 실업자들이 급증할 경우 사회 문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직 정부는 "기업이 나이를 기준으로 퇴직을 강요하거나 채용할 때 연령 제한을 두는 데 대한 법적인 제재는 별 의미가 없다"며 뒷짐을 지고 있다.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지, 정부가 나서기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최성재(사회복지)교수는 "정부가 50세 또는 55세 이상 퇴직자들을 관리할 수 있는 인력관리공단 등을 만들어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이 차별에 대한 제도적 대책이 부족한 상태에서 기업들은 사후 대책에 힘을 더 쓰고 있다.

대한항공은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의 조기 퇴직자들을 위해 '마이라이프 플랜'이란 퇴직자 지원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4~5월 만 40세 이상의 10년 이상 근속자를 대상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아 전문 컨설팅사에 의뢰해 재취업 및 창업 교육을 하고 있다. SKT.KT.우리은행.국민은행 등 많은 기업과 육해공군에서도 외환위기 직후부터 다양한 퇴직자 지원제도를 두고 있다.

이는 조기 퇴직자들이 퇴직 후 '연착륙'을 도와주고 회사에 대한 반감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나이 차별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중앙일보 특별취재팀=남윤호.정철근.장정훈.하현옥.권근영(정책기획부), 최지영 기자(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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