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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칼럼

사죄 요구는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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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몇 번을 읽었다. 빨간 줄을 쳐가며 읽고 또 읽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전후 70주년 담화(아베 담화) 말이다. 첫 느낌은 그저 그랬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명절날 잔칫상 차리듯 많이 늘어놓기는 했지만 선명하게 다가오는 메시지가 없었다. 중언부언한 느낌이라고 할까. 논술 시험 답안지였다면 C+ 이상 받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웬걸! 반복해 읽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나름 고심해서 쓴 노작(勞作)은 됐다. 단어 하나, 표현 한 줄까지 세심하게 숙고하고 탁마(琢磨)한 흔적이 역력했다. 논리 구조도 제법 틀을 갖추고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선 평점이 훨씬 높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베 스스로 서두에서 밝혔듯이 담화는 역사의 교훈과 미래를 향한 다짐을 두 축으로 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구축된 새로운 국제질서에 도전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에게 손해와 고통을 준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표명한 역대 정부의 입장은 앞으로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전쟁과 무관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사과를 요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이어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겠다는 각오로 끝을 맺었다.

 예상대로 미국 정부는 두 손 들어 환영했다. 백악관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아베 담화를 환영하며 전후 일본이 ‘모든 국가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중앙일보가 워싱턴의 싱크탱크와 학계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3%가 아베 담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일본 국내 여론조차 긍정(44%)과 부정(37%)으로 평가가 엇갈리는 데 비하면 매우 후한 평가다.

 일본의 식민 통치와 침략을 가장 고통스럽게 경험한 한국과 중국 입장에서 아베 담화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아베는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사죄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조롱하는 태도가 확연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국권 침탈로 이어진 러일전쟁에 대해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다”고 강변한 게 대표적이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놓고 아시아인에게 용기를 줬다고 주장하는 것은 궤변이다. 조금이라도 한국을 배려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그는 반성과 사죄를 언급하면서도 그 대상을 ‘지난 대전(大戰)에서의 행동’으로 국한했다. 식민지 지배는 대상에서 빠져 있다. 전쟁의 그늘에서 명예와 존엄에 상처 입은 여성을 거론하면서도 일본군 위안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황국신민이자 내지인(內地人)이었던 조선인에 대해선 사죄할 게 없다는 인식의 발로였을 것이다. 아베 담화에 대해 한국과 중국에서 물타기, 유체이탈, 간접사과, 무늬만 사과 등의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아베는 “침략에 대한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공언하고, 침략전쟁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보란 듯이 참배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가 무엇인지를 아베 담화는 분명하게 보여줬다. A급 전범을 외조부로 둔 그의 한계다. 더 이상 그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400여 년 전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는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임진왜란은 중·일 전쟁이 됐다. 충무공이 활약한 바다에서만 한·일 전쟁 양상을 보였을 뿐이다. 송복 선생(연세대 명예교수)이 저서(『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에서 지적한 대로 임진왜란은 ‘조선 분할전쟁’이었다. 왜는 조선 남쪽 4도를 차지하려 했고, 명은 한강 이북 4도를 지켜 요동 방어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수모를 당하고도 조선은 ‘징비(懲毖·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함)’하지 못했다. 급망(急忘)과 외세 의존에 빠진 조선은 300년 후 나라를 일본에 고스란히 넘겨주고 말았다. 스스로 강해지지 못해 식민지가 됐고, 마침내 남북 분할까지 현실이 됐다.

 광복 70년을 맞은 한국에 ‘위대한 여정’을 자축하는 함성과 합창은 있었지만 어디서도 징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징비를 통한 자강(自强)이야말로 아베 담화에 대한 우리의 가장 강력한 대응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광복 70년 경축사에도 징비와 자강의 외침은 없었다. 목청만 높인다고 되는 건 물론 아니다. 지혜로워져야 하고, 도덕과 품격으로 존경을 받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지혜로운가. 아베를 부끄럽게 할 만한 덕성이 있는가. 아직 멀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