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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놈 바둑 왜 두나” … 이승만 질책에 순장바둑 둔 조남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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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호 26면

1954년 이승만 대통령(가운데)이 경무대에서 조남철(손을 뻗어 착점하는 이)의 순장바둑을 감상하고 있다. [한국기원]
1 일본 쇼소인에 보관되어 있는 목화자단기국.

1954년 12월. 경무대에서 바둑을 관전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서릿발 같은 말을 던졌다. “자네들은 어째서 왜놈 바둑을 두고 있는가.” 순간 조남철 4단의 등엔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조남철은 곧 평정을 찾았다. “각하, 바둑은 본래 자유롭게 둡니다만 나라마다 변형했을 뿐입니다. 순장바둑으로 두어보겠습니다.”
순장바둑을 관전한 이 대통령은 결재 서류에 ‘가만(可晩)’이라고 사인해 줬다. 이듬해 3월 제1회 한·중 바둑대회 출국 허가를 얻은 과정이다. 당시엔 달러가 부족해 대통령의 재가 없이는 환전도 할 수 없었다.
요즘 우리가 두는 바둑은 일본에서 온 것이다. 20세기 초까지 한국엔 순장바둑, 조선바둑, 또는 화점(花點)바둑이라고도 불린 고유의 기법(棋法)이 있었다.
59년 인도 북동부 시킴(Sikkim) 왕국의 왕자가 도쿄의 세계불교대회에 참석할 때 면직(綿織)에 그린 바둑판을 휴대하고 일본기원에 들렀다. 가로 68cm, 세로 72cm로 매우 크게 그려진 17줄 바둑판이었다. 변과 천원에 화점 표시가 있는 오늘의 바둑판과 달리 점 표시가 네 귀의 3(三)에 있었다.
돌도 위는 둥글고 밑쪽은 평평한 모양을 한 만두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평평한 쪽을 밑으로 놓지 않는 한 언제든지 무를 수 있다는 규칙이다. 둥근 쪽을 밑으로 해 두어놓고선 얼마든지 장고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 세상에는 갖가지 바둑판이 있고 갖가지 규칙이 있다. 대만은 재벌 잉창치(應昌期)가 독자적으로 만든 ‘응씨룰’을 쓰고 있다. 티베트에도 또 다른 바둑규칙이 있다.

[반상(盤上)의 향기] 우리 고유의 바둑

2 1995년 한국 바둑 50년을 기념해 조남철 9단(오른쪽)이 이창호 9단과 순장바둑으로 기념대국을 하고 있다.

대국의 출발 조건이 서로 다른 바둑 창조
문화마다 서로 다른 바둑 이해가 있어 서로 다른 바둑이 있었다. 초점은 대국 시 출발 조건. 20세기 초까지 일본은 반상에 돌 하나 놓지 않은 자유포석법을, 중국은 사전배석제(기보2)를, 조선은 사전배석제의 일종인 순장바둑(기보1)을 썼다.
순장은 반상에 돌을 17개 먼저 배치한 다음에 흑1을 천원에 두면서 대국을 시작했다. 바둑판도 모두 17개의 꽃무늬를 장점(將點)이라는 자리에 새긴 판을 사용한다. 천원 자리에도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복(腹)점 또는 배꼽점이라고 불렀다.
‘순장’의 한자 표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순장(順丈)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17점 배석(配石)을 큰 곳에 순리대로 포진한다고 해서 그리 부른다 한다. 일반적으로는 순장(巡將)으로 쓴다. 순장은 궁성 수비를 하는 종3품 이상의 벼슬아치다. 그러니 17점 배석을 장수로 보고 ‘장수가 순회·정찰한다’고 본다. 조선의 유교적 세계관을 반상에 투사한 것이다. 논어에 공자 말씀하기를 “정치를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마치 북극성이 자리를 잡고 뭇 별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과 같다(子曰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는 세계관이다. 요컨대 천원을 북극성으로 볼 때 이를 둘러싸고 지키는 순장이 17개의 돌이다.

“삼국시대부터 순장바둑” 학설도
바둑의 어원을 잠시 살피자. 해방 전까지는 바둑을 ‘바독’ 또는 ‘바돌’이라고 불렀다. 육당 최남선은 바투(batu)라는 인도네시아 어를 바둑의 원말로 보았다. batu와 같은 계열인 Bdh란 단어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괴롭히다, 맹렬히 압박하다, 포위하다….
최남선의 견해는 놀라웠다. 일찍이 고대 중국에서 쓰인 바둑의 뜻이 위기(圍棋)였기 때문이다. 위기는 ‘둘러싼다’는 뜻이니, 여기서도 바둑의 어원이 얼마나 넓게 퍼져 나갔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과연 고대에도 문화 전파는 범(凡) 지구적인 수준이었던가 싶다. 자생적인 문화인 듯해도 실은 문명의 중심으로부터 전파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동안 밝혀진 바를 보자. 중종(재위 1506~44) 때의 문인 송석거사(松石居士) 최여신의 바둑시에 “순장점이 푸른색인지 붉은색인지 잘못 보았네(排子靑木錯誤看)”라는 시구가 있다. 여기서 ‘배자(排子)’는 순장바둑에서 미리 놓는 돌을 지칭한다.
숙종(재위 1674~1720) 때 노가재(老稼齋) 김창업이 그의 형 김창엽을 따라 동지사(冬至使 ) 일행으로 중국 연경을 다녀오면서 기행문 『노가재 연행록(燕行錄)』을 썼다. 사하(沙河)를 지날 때 “임진년 2월 21일 한인(漢人) 유계적(劉啓迪)의 집에서 유숙했다. 주인은 소금장수였으며 글을 몰랐다. 방안에 바둑판이 있기에 주인을 불러 두어 보니 두는 법이 우리식과 똑 같았으나, 다만 초두에 배자 없는 것이 달랐다.”
그럼 순장바둑은 조선시대의 바둑일까. 바둑 서지학자 안영이의 삼국시대 설이 있다. 일본 나라(奈良)의 쇼소인(正倉院)에 보관된 보물에 목화자단기국(사진1)과 홍아(紅牙) 감아(紺牙) 상아 바둑알이 있다.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바둑판으로 일본 왕실의 보물이다. 헌물장(獻物帳·쇼쇼인의 보물에 대한 헌납 목록)은 이를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선물로 기록하고 있다.
자단기국의 천원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으며 17개 순장용 꽃잎 무늬 화점도 선명하다. 바둑판을 뒤집으면 역시 중앙에도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바둑알의 수는 총 300개로 순장바둑을 두기에 딱 알맞다. 순장은 배석 때문에 250~260개 돌이면 한 판을 두기에 충분하다. 1926~35년에 두어진 순장바둑 20국을 보면 평균이 236수이고 가장 긴 판도 281수를 넘지 않는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는 대략 이 정도다. 삼국시대설도 설득력이 높은데 그때엔 순장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을 것 같다.

한·중·일의 계가법 모두 달라
흑백이 각각 8개의 기착점(기보1)을 놓은 뒤 흑이 천원에 첫 점을 놓으면서 대국을 시작한다. 천원 1착은 절대다. 계가할 때는 잡은 돌을 상대에게 돌려주고, 경계선에서 단수가 안 되는 곳의 돌을 모두 들어낸 다음에 집 수를 비교해 승부를 다툰다. 한국과 일본, 중국은 서로 다른 계가법을 갖고 있었는데 차이를 간단히 보면 <표1>과 같다.
문제가 남아 있다. 중앙에 놓은 천원점을 착수로 봐야 하느냐, 배석으로 봐야 하느냐. 배석이라면 순장바둑은 17개를 미리 놓는 것이 아니라 18개를 미리 놓는다고 해야 한다.
증거는 상반된다. 1926~38년 중외일보와 매일신보는 모두 6국의 순장바둑을 실으면서 제1착을 백으로 시작했다. 천원엔 먼저 흑돌을 미리 놓아두었기에 결과적으로 모두 18개의 돌을 반상에 먼저 놓고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1933년 1년 동안 총 33국을 실으면서 모두 일관되게 천원의 흑1을 첫 점으로 표기했다. 안영이는 “복점의 흑1로 시작한 방식이 정법(正法)”이라고 했고 조남철은 천원의 흑돌을 배석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싸우는 맛 통쾌하지만 답답” 평가
1930년대에 이르자 일본의 자유포석제가 국내에서도 성행했다. 37년 채극문·유진하 등 노국수들이 모여서 순장바둑의 폐지를 결의했다. “바둑의 오묘한 맛이 현대바둑에 비해 덜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조선일보는 37년 3월 말부터 한 달여 동안 순장기보를 게재했지만 그 후엔 자유포석제 바둑을 싣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기바둑에서는 여전히 순장바둑을 두곤 했다. 일본기원 초단으로 귀국한 조남철이 45년 11월 한성기원을 발족하고 순장바둑 폐지에 앞장서면서부터 순장은 자취를 감췄다.
프로와 아마추어에게 질문을 해봤다. 중국의 사전배석제와 순장바둑 그리고 일본의 자유포석제로 초반 7수까지 둔 슈사쿠(秀策) 포석을 보여주었다. 질문했다.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기준으로 으뜸가는 것을 선택하라.” 결과는 <표2>에 있다.
문외한은 중국의 배석제를, 프로는 자유포석제를 선호했다. 순장바둑은 호감을 얻지 못했다. “답답하다” “정체감을 느낀다”고들 했다. 슈사쿠 포석을 프로들이 많이 선택한 것은 프로의 편견으로도 볼 수 있다. 프로들은 그런 바둑을 훈련 받았던 것이다.
순장바둑의 단점 하나는 싸움이 첫수부터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이 서로 엇갈려 있고 그것도 가까이 붙어 있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가 없다. 하도 싸우니까 호흡은 가쁘고 급한 마음이 일어난다.
포석은 곧 질서. 질서는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강하면 놀이로써 부적당하다.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배석에 사용되는 돌이 많으면 포석이 이미 끝난 거다. 일종의 기득권이 강하게 잠재된 것과 같아 바둑이 사활 중심일 수밖에 없다. 전쟁의 반복은 뇌를 지치게 한다. 세상이 그렇듯이 바둑판도 땅이 크면 뛰어놀 수 있다. 상대가 보기 싫으면 나가서 놀면 된다. 한때의 전통이었지만 순장바둑은 그런 공간이 부족해 활달하게 뛰어놀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문용직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한국기원 전문기사 5단. 1983년 전문기사 입단. 88년 제3기 프로 신왕전에서 우승, 제5기 박카스배에서 준우승했다. 94년 서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바둑의 발견』 『주역의 발견』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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