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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NIE] 왜 인터넷서 원조교제 기록을 지워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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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질 권리 vs 기억할 권리

사이버 공간에 있는 내 정보를 지울 수 있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찬성 논리와 정치인·범죄자의 신분 세탁에 악용될 수 있다는 반대 논리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반대하는 쪽은 ‘잊혀질 권리’가 국민의 알 권리, 즉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미 유럽에선 ‘잊혀질 권리’가 광범위하게 인정받고 있다.

지난달 일본에선 범죄자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판결도 나왔다. 논쟁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다. 한국도 정부 관계부처를 중심으로 ‘잊혀질 권리’ 도입을 위한 공청회를 여는 등 논쟁을 시작했다. 교과서와 언론, 각종 연구자료를 통해 ‘잊혀질 권리’에 대해 알아봤다.

논쟁의 시작- 내 과거 삭제해달라 유럽서 ‘구글 재판’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논란은 최근에 시작됐지만 기본 개념은 20년 전에 등장했다. 1995년 유럽연합(EU)이 만든 ‘유럽 개인정보 보호 규정 및 지침’에서 최초로 언급된 후 2012년 EU가 제정한 ‘일반 정보 보호 규정’을 통해 법적 근거를 갖게 됐다.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는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판결을 내놓았다.

일명 ‘구글 재판’으로 불리는 이 재판은 스페인 변호사 마리오 곤잘레스가 구글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다. 마리오 곤잘레스는 구글에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 과거 자신의 집이 경매 처분됐던 기사가 뜨는 것과 관련해 이미 빚을 모두 갚았고 시간이 오래 지나 부적절한 정보라고 주장하며 해당 기사의 삭제를 요청했다. 유럽의 대법원인 유럽사법재판소는 “인명검색에서 해당 기사 링크를 삭제하라”며 마리오 곤잘레스의 손을 들어줬다.

판결 이후 구글은 유럽에 한해 홈페이지를 통해 개인 정보 삭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달 구글이 발표한 투명성 보고서에 따르면 구글 재판 이후 유럽에서 구글에 접수된 개인 정보 삭제 요청 건수는 102만7495건에 달했다. 구글은 이 중 시효성·적법성을 따져 41.3%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잊혀질 권리- “무심코 올라간 글·사진 때문에 피해”

디지털 세상에서 생산되고 축적되는 정보는 유통기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한 번 올라간 기록은 무제한으로 복제되고 유통되며 전 세계 네트워크를 흘러 다닌다.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정보를 클릭 몇 번으로 쉽게 검색해 볼 수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 J.D. 라시카는 98년 인터넷 잡지 ‘살롱’에 “우리의 과거는 디지털 피부에 문신처럼 아로새겨지고 있다…인터넷은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교과서는 정보 사회의 등장과 사이버 공간의 특성에 대해 조명한다. 미래엔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사이버 공간은 익명성, 시공간의 초월성, 정보의 개방성 등과 같은 특성을 지닌다…사이버 공간에서 사람들은 ‘탈억제 효과’를 경험한다”고 적고 있다. ‘탈억제 효과’란 무언가에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적게 받으면서 보다 개방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사이버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해 간다. 정보 사회의 발전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동반한다. 인터넷의 발전은 생활의 편리성을 증대시켰고, 자유로운 의사 표출은 대중의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했다. 하지만 교과서는 “사이버 따돌림과 같은 사이버 폭력, 해킹 등 개인 정보 불법 유출, 전자 감시 사회 등 새로운 윤리적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잊혀질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무분별한 ‘신상 털기’와 해킹 등 개인 정보 침해로부터 최소한의 보호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망각하지 않는 인터넷’에 망각하는 기술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한 번 인터넷에 올라간 정보는 그것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무제한적으로 복제되고 유포된다. 한때 무심코 인터넷에 올렸던 글·사진·동영상 때문에 취업·결혼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다. ‘몸캠’ 피싱과 불법 촬영 등 범죄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극단적 사례도 있다. “어릴 때 쓴 글로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형을 다 마쳐도 죄인 취급을 받는 등 국민들의 행복추구권과 새 출발한 권리, 일사부재리의 원칙 같은 인간다운 삶의 원칙과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중앙일보 2013년 3월 2일 '신상 털기에 맞설 자기방어권 필요하다')

기억할 권리- “범죄자·정치인 신분 세탁에 악용”

‘잊혀질 권리’의 도입을 반대하는 쪽은 ‘기억할 권리’를 주장한다.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에 더 방점을 찍는 입장이다. 이들은 인터넷상의 기록은 사적 정보이면서도 공적 기록의 역할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당대의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받는 언론 기사, 정치인·기업인 등 공인에 대한 자유롭고 공개된 평가와 기록은 인터넷이 가진 표현의 자유 덕에 가능했던 여론 형성의 긍정적인 사례다. 단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질 권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면 정치인·범죄자들의 신분 세탁에 악용돼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다. 실제 지난달 일본에선 원조교제 범죄 이력을 지닌 한 남성이 구글을 대상으로 자신의 체포 이력이 검색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그 남성은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데 지장을 받고 있다. 인격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법원은 이 남성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했다. 법원은 “공인이 아니고 일반인이며 벌금을 내고 속죄한 만큼 체포 이력을 공개하지 않아야 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범죄자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이번 판결을 놓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죄를 충분히 뉘우친 범죄자의 경우 사회 복귀 차원에서 사회가 포용하고 감싸야 한다는 입장과 다른 범죄 예방 차원에서라도 공개돼야 한다는 입장이 맞선다.

언론은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 ‘잊혀질 권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그 적용 대상과 범위에 대해선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인다. 적어도 정치인과 같은 공인에게는 ‘잊혀질 권리’보다 ‘기억될 의무’가 더 앞선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정치인 등의 공인과 관련된 공적인 정보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 일반 국민들에 의해 평가되어야 할, 그리고 공유되어야 할 정보다…우리는 개인정보의 보호, 사생활 보호 이외에도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알 권리라는 가치도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중앙일보 2014년 8월 20일 '잊혀질 권리' 법제화 필요한가)


유럽과 미국의 시각차 유럽은 전통적으로 인권과 개인 정보 보호에 방점을 찍어왔던 반면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우선시 한다. 미국 수정헌법 제1조는 집회·출판·종교의 자유를 명시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관심은 높다. 미국에서 ‘잊혀질 권리’는 민간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 상품으로 먼저 등장했다. 사진과 글이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삭제되는 기능을 제공하는 앱인 ‘스냅챗’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의뢰인의 요청에 따라 인터넷에 남겨진 글·사진·동영상 등을 지워주는 ‘디지털 세탁소’가 성행한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e메일, 홈페이지, 게임 머니 등 디지털 유산의 상속과 처리를 대행해주는 ‘디지털 장의사’도 등장했다. 미국도 일부 주에선 ‘잊혀질 권리’의 제도화에 나서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관련 법을 제정해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

글=정현진 기자 Jeong.hyeonjin@joongang.co.kr 자문=권영부 서울 동북고 수석교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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