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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빨간 마스크, 통통 귀신, 버스 할머니 … 오늘 밤엔 무슨 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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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일러스트레이터 배민호]

“성형수술을 하다 부작용으로 입이 찢어졌대. 여자는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아 미쳐버렸다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도 있어. 아무튼 그날 이후 밤마다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 여자가 꼭 나타난다는 거야. 하얀색 코트에 빨간 마스크를 하고 있는데 눈이 마주치면 마스크를 벗고 이렇게 묻는대. ‘나 예뻐?’”

 1990년대 대한민국 어린이들을 발칵 뒤집히게 한 ‘빨간 마스크’다. ‘예쁘다’고 대답하면 코트 속에서 낫을 꺼내 그 사람의 입을 찢고 ‘못생겼다’고 하면 바로 죽인다는 공포의 여인이다. 이 여인은 100m 달리기를 10초 안에 주파한다고 알려져 있어 일단 마주치면 도망갈 수도 없다. 날이 저물 때쯤 아이들은 친구와 더 놀고 싶어도 앞다퉈 집에 들어갔다. 그만큼 빨간 마스크는 전국적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괴담(怪談)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다. 과거의 괴담이 시대 상황에 맞게 변형되거나 전혀 다른 종류의 괴담이 생겨나기도 했다. 서양 괴담 『사라진 히치하이커』의 저자 잰 해럴드 룬반드 유타대 교수는 괴담의 요건으로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 단순한 이야기 ▶실재한다는 신념 ▶의미 있는 메시지 또는 도덕성 함유 등을 꼽았다. 분명한 건 당대의 괴담들이 ‘동시대 사회 구성원의 공통된 정서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점이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사람은 ‘무언가’에 불안을 느끼면 그에 대한 인과관계 등을 찾아 해소하려는 심리가 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내용이더라도 괴담을 만들어내고, 또 찾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소 터무니없어 보이는 빨간 마스크 괴담에도 나름의 변(辯)이 있다. 당시 10대를 대상으로 한 유괴·폭력 사건이 사회문제였다. 그 어떤 부모도 자신의 자녀가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어두워지면 아이들이 순순히 집에 들어올 수 있게끔 괴담이 퍼졌다는 설이다.

 10년 가까이 전국의 도시 괴담을 수집해 보관하고 있는 중앙대 김종대(민속학) 교수는 “괴담이 생겨나려면 먼저 사람이 많아야 하고, 그 구성원들이 조금은 심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도시가 갖고 있는 특유의 개인주의와 폐쇄성 등이 결합하면 괴담은 더욱 그럴듯한 ‘이야기’로 포장된다. 일제 강점기 때도 도시 괴담은 있었다. 1920년대 경성에서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에게 버림받아 목숨을 끊은 여자의 시신이 20일 넘도록 부패하지 않았다는 괴담이 있었다. 이 여자의 부모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남성을 붙잡고 ‘딸의 시신이 있는 방에 며칠만 묵어주면 쌀을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는 것이다.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자 한 신문기자가 실제로 취재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처럼 정조를 중시하던 과거 한국 사회에서 ‘사랑에 버림받은, 또는 결혼에 실패한 여인의 한’은 전형적인 괴담 소재였다.

 이후 근대화와 독재정권 시절을 거치며 괴담은 보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학교’다. ‘밤이 되면 학교 동상이 움직인다’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풍금 소리가 들린다’ ‘학교 전설 100가지를 알면 죽는다’ 등은 주로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용 괴담이다. 중·고등학교에서 돌던 괴담은 ‘통통귀신’이 대표적이다. 전교 1등을 시기하던 전교 2등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전교 1등을 옥상에서 밀었다. 전교 1등은 머리부터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후 전교 2등이 밤에 혼자 남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통통통, 여기도 없네.” 무서워진 2등이 책상 밑으로 숨었다.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더니 “통통통, 너 여기 있었구나!”하며 전교 1등 귀신이 거꾸로 된 머리를 ‘통통’ 튀기며 달려왔다. 괴담은 여기서 끝난다. 김종대 교수는 “통통귀신 이야기는 한국 학생들의 ‘입시 스트레스’와 ‘우정’에 대한 엇갈린 심리가 잘 드러난 괴담”이라고 했다.

 9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인신매매’ 괴담이 등장한다.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시기였다. 가장 유명한 건 ‘버스 할머니’ 괴담이다. 버스에서 할머니가 여학생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내리게 한 다음 뒤에 대기하고 있던 봉고차에 억지로 태워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긴다는 얘기다. 해외 여행객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괴담의 공간은 외국으로도 넓어졌다. ‘신혼부부가 외국으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다리와 팔이 잘려 서커스단에 팔려갔다’ ‘장기 적출을 당했다’ 등의 스토리다. 배경 국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달라졌다. 중국에서 태국으로, 태국에서 인도로 변하기도 했는데 그때그때 매스컴이 전하는 해당 국가의 이미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온라인 괴담 사이트인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잠밤기)’ 운영자 송준의(33)씨는 “그 시대마다 유행하는 괴담의 유형이 있는데 과거에는 주로 귀신 등 오컬트(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초자연적 현상)적인 존재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최근엔 그 자리를 ‘인간’이 대체하고 있다”고 전했다. 대표적인 예로 ‘엘리베이터 괴담’을 들었다. 과거 엘리베이터 괴담은 한 학생이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어머니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어머니가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라는 대사를 날린다. 어머니가 알고 보니 ‘귀신’이었다는 반전이다. 반면 현재의 엘리베이터 괴담은 한 여학생이 처음 보는 남성과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남성이 알고 보니 ‘연쇄살인범’이라는 내용이다. 송씨는 “유영철·강호순 사건 등 흉악 범죄로 나라가 뒤숭숭할 때 이런 종류의 괴담이 유난히 많이 들려온다”며 “진짜 무서운 건 사실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요즘 대중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요즘 괴담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주목한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며느리가 진짓상을 정성스레 차려도 시아버지는 늘 “옛날 할멈이 해주던 밥이 훨씬 맛있었다”며 며느리를 타박했다. 화가 난 며느리가 어느 날 국에 농약을 조금 섞어서 내왔다. 그날 국 맛을 본 시아버지가 말했다. “음, 바로 이 맛이야. 우리 할멈이 해주던 맛이랑 똑같네!” 가족 관계에서 흔히 생길 수 있는 갈등을 소재로 한 괴담이다.

 괴담은 반복되고, 또 진화해 왔다지만 전문가들은 현 시대를 ‘괴담 기근’ 시대라고 표현한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괴담을 연구해온 김종대 교수는 이제 더 이상 전국의 도시 괴담을 수집하지 않는다. 유의미한 구전(口傳) 괴담이 거의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뉴스를 통해 매일 갖가지 사건·사고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은 괴담보다 더 괴담스러운 건 바로 ‘현실’임을 깨닫게 됐다. 괴담을 새롭게 만들어낼 이유는 물론 여유조차 사라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혹자는 괴담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한다. ‘안전이 보장된 유사 공포’라는 거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빨간 마스크’나 ‘홍콩할매’ 같은 상징적인 괴담이 없다는 건 그래서 더 괴기스럽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S BOX] 화장실 귀신, 빨간 마스크 모두 일본이 ‘원조’

어두컴컴한 화장실에서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속삭이던 화장실 귀신의 국적은 사실 일본이다. 일본의 옛날 화장실은 흐르는 물 위에 지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일본에는 물에 사는 전통 요괴 ‘갓파(河童)’가 사람이 볼일을 보고 있으면 그 사람 항문에 있는 구슬 ‘방자옥’을 빼간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 일본 에도시대 때 유행한 색종이가 결합돼 원조 ‘화장실 괴담’이 생겨났다. 반면 한국의 화장실은 용변을 본 뒤 바로 그 위에 재를 덮었고, 뒤처리도 호박잎 등으로 처리해 ‘화장실 귀신’이 등장할 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학교 터가 원래는 공동묘지였다’는 학교괴담의 고전 격인 괴담도 일본에서 유래했다. 일본에는 원래 동네 곳곳에 묘(墓)가 많아 건물을 지을 때 묏자리를 옮기고 짓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은 묘지를 동네 가까이 세우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이런 시각으로 봤을 때 ‘학교 터가 알고 보니 공동묘지’라는 괴담은 한국 정서와는 어울리지 않는 괴담이다.

 빨간 마스크도 1970년대 말부터 유행한 일본의 ‘입 찢어진 여자’가 원조다. ‘입 찢어진 여자’ 괴담은 78년 12월부터 일본 기후(岐阜)현에서 발생해 이듬해 급속히 퍼졌다고 한다. ‘마늘을 싫어한다’ ‘사탕을 주면 잡지 않는다’ ‘포마드라는 단어를 세 번 외쳐라’ 등 퇴치법도 있다.

 한국에 일본 괴담들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건 개화기 이후부터라는 설이 유력하다, 김종대 중앙대 교수는 “일본은 1년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이 초를 켜 놓고 100가지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전통이었다”며 “덕분에 요괴나 괴담 문화가 상당히 발달해 있다”고 말했다. 일본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나 ‘디지몬’ 시리즈도 이 문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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