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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타는 하원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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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

영국 의회, 웨스트민스터궁에서 걸음을 뗍니다. 아이러니한 공간입니다. 바로 옆 웨스트민스터사원은 왕위에 오르고 왕으로 묻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궁 안엔 찰스 1세의 목을 쳤던 ‘의회의 아버지’ 올리버 크롬웰이 우뚝 서 있습니다.

 곧 지나치는 의회 광장에서도 모순을 느낍니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전쟁광으로 여겨졌습니다. 곧 세계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지만 종전 직후 선거에서 내동댕이쳐집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정치인으로 정점에 선 인물이자 당의 몰락을 재촉한 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자유(민주)당은 화려한 전통에 비하면 너무나 옹색합니다. 남아공의 얀 스뮈츠는 영국에 맞서 남아공의 독립을 이뤄냈지만 2차 대전 중엔 영국과 함께 자유세계를 지켜냈습니다. 대영제국은 해체했지만 영연방을 탄생시켰습니다.

 계속 걷습니다. 왕을 처형한 건물이 나옵니다. 당시 왕궁 중 유일하게 현존합니다. 그 맞은편이 다우닝가. 현재 권력의 거처입니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도 발길을 재촉하는 이유는 하나, 존 버커우 하원의장 때문입니다. 그가 택시비로 172파운드, 우리 돈으로 31만원을 준 길을 따라 걷는 겁니다. 장거리겠다고요? 아닙니다. 1㎞ 남짓입니다. 영국의 살인적 물가 탓이겠다고요? 금(金)물을 연료로 쓰는 것도 아닌데, 일반 택시론 대충 1만2000원 정도 합니다. 버커우 의장은 고급차를 빌렸습니다. 그는 런던 외곽의 루턴 공항을 갈 때도 67만원을 지불했습니다.

 “여기도 별 수 없구나”라고 하다가도 뭔가 걸립니다. 하원의장이 공무임에도 택시를 타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국회 본관에서 의원회관으로 200m 이동하는 데도 관용차를 타곤 하는 우리네로선 인지부조화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영국 의원들에겐 자체 관용차가 없습니다. 의원은 물론 의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반 의원은 오후 7시30분 넘어 회의가 끝났다고 입증해야 택시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교통비만 빡빡한 게 아닙니다. 의원 연봉이 우리와 같은 1억원이라지만 경제 수준을 감안하면 박봉입니다. 의원내각제니 일을 덜할 리 만무한데도 보좌진 인건비 총액은 2억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7000만원대부터 2000만원대까지 9명을 둡니다.

 걷기 시작한 지 15분. 버커우 의장의 172파운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딱하게 보던 감정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국회의원 욕하는 게 국민적 스포츠인 우리나라가 의도했든 안 했든 후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한 아이러니입니다.

고정애 런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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