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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이 바꾸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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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늦게 결혼해 첫아이를 출산한 친구가 말했다. “미안, 나 아이를 낳고 나서 향후 100년간 우주의 평화를 기원하게 됐어.” 미안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만날 때마다 ‘현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부르짖으며 ‘내 한 몸 즐겁게 살고 가자’라는 자포자기적 위로를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녀가 엄마가 되고 나니, 내 아이가 살아갈 동안 지구에 거대한 운석 같은 게 떨어지지 않기를, 지구온난화가 더 이상 심해지지 않기를 바라게 됐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모성은 역시 위대하다. 다른 건 몰라도 사회적 공감과 자아 확장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는 부모가 되는 것만큼 좋은 길이 없는 것 같다고 이 친구를 보며 생각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파동 때 첫 등장한 ‘유모차 부대’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터. 이후 한국 엄마들은 무상급식 파동에서 세월호 참사, 올해 들어서는 메르스 사태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시위에 나오는 게 윤리적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지만, 그 바탕엔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진심이 담겨 있다는 건 의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 누구의 아이도 죽여서는 안 된다.” “이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지난 주말, 일본 도쿄(東京) 시내에 등장한 엄마 시위대가 외쳤다는 이 구호에 또 뭉클했다. 도쿄뿐 아니라 니가타(新潟)와 교토(京都), 후쿠오카(福岡) 등 전국 각지에서 수천 명의 엄마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중위원에서 통과시킨 안보법안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한다.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면 언젠가 내 아이가 전쟁터로 내몰릴 수 있다는 불안이 엄마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엄마들이 정치를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고? ‘안보법제에 반대하는 엄마 모임’을 조직한 세 아이의 엄마 사이고 미나코(西鄕南海子·27)가 인터뷰에서 한 이 말은 명답이다. “우리가 군사와 외교 전문가는 아니지만, 매일 집에서 생명의 현장(육아)과 마주하고 있다.”

 정치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던 일본 젊은이들이 ‘전쟁할 수 있는 일본’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왔다는 뉴스도 놀라웠지만, 엄마들의 분노는 더욱 믿음직하다. 일본인 친구 한 명은 지난주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영희상,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위에 나가 봤어.” 일본에서 공부할 때 “일본 대학 캠퍼스에는 왜 정치 대자보 하나 붙어 있지 않아?”라는 내 질문에 “으응? 꼭 그래야 하는 건가?”라고 답했던 친구다. 그녀가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위해, 평화로운 일본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갔다고 했다. 이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기를. 엄마들이여, 세계의 평화를 부탁할게.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