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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장칭의 편 … 간첩 혐의로 쑨웨이스 체포 작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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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호 29면

체포되기 직전의 쑨웨이스. 1968년 2월 베이징. [사진 김명호]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에게 쑨양(孫泱·손앙)이라는 오빠가 있었다. 중국 홍군의 창시자 주더(朱德·주덕)는 8로군 총사령관 시절부터 쑨앙을 챙겼다. 전쟁터마다 데리고 다니며 교육도 직접 시켰다. “네 아버지는 단아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빈 군인은 생각과 행동이 거칠다. 거칠 때와 단정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5>

쑨양은 주더에 관한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었다. 1950년대 말부터 『주더전(朱德傳)』 편찬 작업을 관장했다.

문혁 발발 후, 중국의 실력자로 부상한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는 문인 출신다웠다. 『주더전』을 호되게 비판했다. “군벌을 미화한 책이다. 대 군벌을 개국원수(開國元帥)로 묘사해 역사와 사실을 왜곡했다. 개국원수는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이다. 주더는 한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편찬에 참여한 자들을 심사해라.”

집필자들의 자아비판이 줄을 이었다. “우리가 잘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새로 써야 한다.” 평소 조용했던 쑨양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주더가 지휘하는 모든 전역(戰役)을 직접 본 사람이다. 발언권이 있다고 자부한다. 집필 기간 내내 역사와 사실을 존중했다. 잘못된 게 없는 책이다.” 당시 쑨양의 직책은 중국인민대학 부총장이었다.

인민대학 내에 대자보가 나붙기 시작했다. “쑨양은 항일전쟁 시절 일본이 8로군 총사령관 주더의 신변에 심어놓은 간첩이다. 일본인을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 대자보는 순식간에 베이징 거리로 번져 나갔다.

쑨웨이스 체포와 심문을 전담한 공군사령관 우파셴(오른쪽). 연도 미상.

1967년 10월 2일, 장칭(江靑·강청)은 인민대학으로 달려갔다. 홍위병들 앞에서 선포했다. “쑨양은 일본의 특무(特務)였다. 소련 수정주의와 국민당의 특무이기도 하다. 인민대학 교수와 학생들의 가장 큰 적이다.” 쑨양은 그 자리에서 인민대학 특설감옥으로 끌려갔다. 이쯤 되면,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쑨웨이스는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총리를 찾아갔다. 위병들이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붉은 담장만 바라보다 돌아온 쑨웨이스는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빠를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답장은커녕 연락도 오지 않았다.

입원 중이던 주더도 환자복 차림으로 병원을 나섰다. 주더를 맞이한 저우언라이는 한숨만 내쉬었다. 주더가 돌아가자 옆에 있던 비서에게 한 마디 했다. 비서의 회고록 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총리는 쑨양이 곤경에 처한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보호하려 들면 쑨양은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쑨웨이스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린뱌오(林彪·임표)라면 부탁을 들어줄 것 같았다. 당시 린뱌오는 중국의 2인자였다.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된 린뱌오의 한 마디는 하늘을 나는 새 정도가 아니었다. 비행기를 떨어트리고도 남을 때였다. 성격 상, 청년 시절 자신의 얼굴을 빨갛게 만들었던 여인의 청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문혁 시절 장칭(왼쪽)은 동비우(董必武)에게 많은 예의를 갖췄다. 1969년 가을, 텐안먼 성루.

쑨웨이스의 판단은 정확했지만, 모르는 게 있었다. 린뱌오에게 오는 편지는 그의 부인 예췬(葉群·엽군)의 손을 거치기 마련이었다. 쑨웨이스의 편지를 읽어본 예췬은 장칭에게 일러바쳤다. 장칭은 모스크바에서 린뱌오가 쑨웨이스에게 청혼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에 하나, 옛 정이 다시 살아날까 봐 긴장했다. 예췬과 머리를 맞댔다.

20여일 후, 쑨웨이스는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받았다. “중앙 문혁의 지시를 받고 나왔다.” 중앙 문혁은 장칭을 의미했다. 당시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불청객들은 선포하듯이 몇 마디 남기고 자리를 떴다. “일본특무 쑨양이 10월6일 세상을 떠났다.” 원인을 묻자 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 손으로 인민과 관계를 단절했다. 즉시 화장해 달라며 유골도 남기지 말라고 당부했다.”

12월 말, 쑨웨이의 남편 진산(金山·김산)이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대대적인 가택수색이 뒤따랐다. 서가에 있는 책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갈피에 있던 사진과 편지들을 닥치는 대로 부대 자락에 쑤셔 넣었다.

압수해온 물건들을 본 장칭은 경악했다. 압수한 물건들 중 편지와 일기는 안 보는 것이 관례였지만, 목표가 쑨웨이스이다 보니 원칙 따위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스탈린 생일잔치에 갔던 마오쩌둥이 쑨웨이스와 산책하는 사진을 비롯해 마오가 친필로 서명해서 보낸 책, 당 지도자들과 주고받은 편지,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린 사진, 40년대 말 장칭이 쑨웨이스에게 접근하기 위해 보낸 편지 등 없는 게 없었다. 저우언라이와 찍은 사진 중에는 눈꼴 사나운 모습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칭과 예췬은 저우언라이에 관한 증거도 확보했다며 쾌재를 불렀다.

장칭은 쑨웨이스 체포를 서둘렀다. 관련기관을 통해, 저우언라이에게 쑨웨이스 체포영장을 발송했다. 죄목은 ‘소련 수정주의 특수 공작자’였다. 증거자료를 살펴본 저우언라이는 고심했다. 쑨웨이스도 쑨웨이스지만, 자신부터 살고 봐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쑨웨이스 외에 친동생 저우언서우(周恩壽·주은수)와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의 처남 왕광치(王光琦·왕광기)의 체포동의서에도 서명했다. 장칭의 지시를 받은 예췬은 공군사령관 우파셴(吳法憲·오법헌)을 불렀다. “아무도 모르게 공군사령부에 감금해라.”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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