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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엔 매맞고 밤엔 슬픈 노래 … 감옥서 숨진 쑨웨이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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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호 29면

1980년 11월 20일,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 피고인 석에 선 장칭. [사진 김명호]

1966년 문혁이 발발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부인 장칭(江靑·강청)을 정치무대에 내세웠다. 중앙희극학원 원장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는 불안했다. 장칭과도 잘 알던 막내 이모 런쥔(任均·임균)을 찾아갔다. “장칭의 정치 참여는 우리에게 불리하다. 나는 30여년 전 장칭이 상하이에서 뭘 하고 다녔는지 너무 잘 안다. 그 여자도 내가 자기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고 있다. 나를 정리하려 들 것이 분명하다. 아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주석과 심상치 않은 일을 벌였다고 의심한다는 말도 들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6>

런쥔은 회고록에서 조카와의 마지막 만남을 회상했다. “한 겨울, 황혼 무렵에 웨이스가 달려왔다. 남편이 잡혀갔다며 모자를 벗었다. 머리털이 하나도 없었다. 연금 중이라고 직감했다. 연금에 처해진 사람의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화장실 청소하고, 밤에는 홍위병들에게 닥달을 당하는 중이다. 홍위병들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비행을 실토하라고 다그친다. 오늘따라 감시가 소홀하기에 빠져 나왔다며 상하이 시절 장칭의 사진이 있으면 한 장도 남기지 말고 태워버리라고 했다. 웨이스는 마오 주석을 믿고 있었다. 주석은 영명하다. 장칭이 함부로 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말도 했다. 웨이스가 돌아가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젊은 시절 장칭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불태워버렸다. 사진 속에 있는 장칭의 옛 남자 친구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9년 12월 16일, 스탈린 생일 잔치를 앞두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마오쩌둥.

쑨웨이스는 동생 신스(新世·신세)와 약속했다. “매주 수요일 밤,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만나자. 내가 못 오면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아라. 장칭은 나와 저우 총리를 한 데 묶으려 한다. 나는 죽어도 상관없다. 총리를 끝까지 보호하겠다.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 너도 준비를 단단히 해라.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마라.”

공군사령관 우파셴(吳法憲·오법헌)은 예췬(葉群·엽군)의 지시에 충실했다. 공군 현역들을 동원해 쑨웨이스를 체포했다. 쑨웨이스는 저우언라이가 직접 서명한 체포영장을 보자 순순히 양손을 내밀었다. 1968년 3월 1일 밤, 그날 따라 하늘에 별도 없었다.

저우언라이와 린뱌오(왼쪽). 1942년 충칭.

쑨웨이스 정도 되면 친청(秦城)감옥에 수감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무슨 여우 짓을 할 지 우려했다. 총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두라고 단단히 일렀다. “베이징시 공안국이 관장하는 더셩먼(德勝門) 감옥에 수감해라. 인자함이 범죄가 될 수 있다. 가혹하게 다뤄라.” 베이징시는 문혁 중앙의 통제하에 있었다. 중앙 문혁은 장칭의 천하였다.

더셩먼 감옥은 국민당 통치 시절 사형수들만 수감하던 감옥이었다. 지옥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온갖 해충이 우글거렸다. 심문은 가혹했다. “소련에서 무슨 훈련을 받았느냐? 수정주의자 후르쇼프와 어떤 사이냐? 귀국 후 무슨 파괴활동을 하라고 지시했느냐?”

쑨웨이스의 옆방에 수감됐던 린리(林利·임리. 중공원로의 딸로 모스크바 유학 시절, 치료 차 온 장칭의 간호사를 지낸 적이 있다)의 구술을 소개한다. “온종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노래를 잘했다. 밤마다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형언하기 힘든 능욕을 당하면서 천천히 죽어갔다. 쑨웨이스인 줄은 나중에 알았다.”

저우언라이는 전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지만, 쑨웨이스의 행방만은 알 길이 없었다. 수양딸이다 보니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난감했다. 6개월 후 갇혀 있던 고급간부 자녀들이 한꺼번에 석방되자 이들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다. “한 여인이 동물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 지금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집히는 데가 있었다. 총리 자격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백방으로 수소문 했지만 허사였다.

10월 14일, 아침을 마친 간수가 쑨웨이스의 감방 문을 열었다. 침상에서 굴러떨어진 모습을 발견하자 발로 툭 찼다. 몇 번을 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쑨웨이스가 진산(金山·김산)과 결혼한지 꼭 18년 되는 날이었다.

3일 후, 장칭이 저우언라이의 집무실을 찾았다. 감옥에서 병사한 사람들의 명단을 건넸다. 순웨이스의 소식도 빼놓지 않았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슬픔을 가눌 길 없다.” 저우언라이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말 같지 않은 소리다. 혁명 열사의 딸을 이렇게 대하는 법이 없다.” 그 자리에서 전화통을 들고 지시했다. “쑨웨이스의 시신을 해부해라. 사망 원인을 철저히 밝혀라.” 장칭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리 집무실을 나왔다. 저우언라이는 쑨웨이스가 이미 화장된 줄 모르고 있었다.쑨웨이스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었다. 1년이 지나서야 옛 연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린뱌오(林彪·임표)는 누구 짓인지를 직감했다. 평소 근처에도 안 가던 예췬의 방으로 달려갔다. 코를 한대 쥐어박고 오른쪽 뺨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장칭이나 너나 똑 같은 것들이다. 천벌을 받을 테니 두고 봐라. 제 명에 못살 것 들이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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