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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공공의 적’ 세계의 마약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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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마약 밀매를 비롯한 각종 범죄로 악명을 떨친 세 명의 마약왕. (위쪽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호아킨 구스만, 쿤사, 파블로 에스코바. [중앙포토]

‘공공의 적 1호’.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다. 그는 지난 11일(현지시간) 멕시코 알티플라노 연방교도소를 탈옥해 멕시코와 미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2001년 세탁물 운반차에 몸을 숨겨 탈옥했다가 지난해 2월 멕시코 해병대에 붙잡혀 수감된 그가 또다시 교도소의 경계망을 뚫고 달아난 것이다.

 구스만은 멕시코와 미국·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마약 밀매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미국에서 구스만을 통하지 않고서는 마리화나와 코카인을 구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마약 밀매를 통해 구스만이 벌어들인 돈은 알려진 것만 1조6000억원 이상.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09년 구스만을 10억 달러(약 1조1000억원) 이상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 대열에 포함시켰다. 2010년에는 세계 10대 수배자 가운데 그가 오사마 빈 라덴에 이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구스만에게는 늘 마약왕이라는 별명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구스만에 앞서 마약 밀매를 통해 거대한 세력을 만들고, 심지어 정부를 상대로 거래까지 한 진짜 마약왕이 있다.

 파블로 에스코바는 콜롬비아의 마약 조직 ‘메데인 카르텔’의 두목으로 전설의 마약왕으로 불렸다. 1949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담배와 주류 밀매에 수완을 보였다. 20세 무렵부턴 본격적으로 코카인 밀매에 나섰고 메데인 카르텔이란 마약 범죄 조직을 만들어 미국 코카인 시장의 80% 이상을 장악했다. 에스코바는 마약 밀매를 통해 쌓은 재산을 바탕으로 자택에 비행장과 동물원을 만들었고 군대까지 조직하며 세를 키웠다. 자신의 고향에서는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고 현금 다발을 뿌리며 주민들을 포섭했다. 콜롬비아 당국의 검사와 판사들마저 에스코바에게 매수당해 수차례에 걸친 기소에도 그의 혐의는 언제나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되곤 했다.

 미국 마약단속국(DEA)과 콜롬비아 특수부대가 끈질긴 추격 끝에 에스코바를 검거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에스코바가 사법당국을 매수해 개인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스코바는 개인교도소 안에 볼링장과 수영장, 개인 식당까지 만들어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를 본 미 사법당국이 범죄인 인도 협약에 따라 에스코바의 신병을 요구했고 이 소식을 들은 에스코바는 유유히 개인교도소를 탈옥했다.

 희대의 마약왕으로 이름을 날린 그의 마지막 모습은 초라했다. 최측근 부하의 배신으로 미국의 델타포스와 멕시코 특수부대에 꼬리를 밟혔고 결국 자신의 고향인 메데인의 뒷골목에서 비참하게 사살됐다.

 세계 최대의 마약산지로 악명 높은 미얀마·태국·라오스 접경의 골든 트라이앵글을 장악해 마약왕국을 만든 태국의 쿤사도 또 한 명의 마약왕으로 불린다. 그의 본명은 장치푸(張奇夫). 양귀비 재배법을 익힌 뒤 60년대 초반부터 골든 트라이앵글을 기반으로 조직을 키워갔다. 아편 밀매로 재산을 쌓고 자신의 세력을 키운 쿤사는 82년 미얀마 국경지대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세력 기반을 다진다. 학교와 병원을 지어 지역 주민들을 불러모으고 지대공미사일을 갖춘 군대를 조직해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했다. 실제 그가 조직한 군대는 태국·미얀마·라오스 정규군 토벌대와 전쟁을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

 90년대 미국에서 유통되는 헤로인의 60%가 쿤사가 재배한 양귀비를 원료로 할 정도로 그는 마약 생산에서 악명을 떨쳤다. 이 때문에 89년 미국 뉴욕 지방법원은 마약 밀매 혐의로 쿤사를 기소하고 200만 달러(약 23억원)의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결국 쿤사는 마약 관련 범죄에 대한 사면과 신변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96년 미얀마 정부군에 투항했다. 이후 은둔 생활을 이어오던 그는 2007년 10월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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